몽골 동부지역 여행과 징기스칸
사방이 막막한 지평선으로 둘러싸인 동몽골 초원에 그곳을 지키던 석상이 있었다. 한국의 한 학자는 이 석상을 ‘고려왕의 초상’이라고도 부른다. 학자가 못되는 나로서는 그 진위를 확인할 길은 없지만 석상의 모양이 제주도의 ‘돌하루방’과 너무 흡사해 그렇게 명명해도 망발은 아니겠다는 생각이 든다. 제주 하루방이 현무암을 재료로 쓰기 때문에 검은색인데 비해 몽골의 그것은 흰색이란 차이가 있을 뿐이다. 특히 두 석상 모두 챙이 두꺼운 모자를 쓰고 있는데, 제주 돌하루방이 북방문화의 전파 증거라는 여러 학설도 이런 생각을 뒷받침해준다. 지금은 울란바타르 역사박물관으로 옮겨졌지만 5년전만 해도 고려왕의 초상은 초원을 지키던 파수꾼 같은 모습으로 초원에 우뚝 솟아 있었다. 그리고 그 초원은 우리 민족의 이동경로라고 일컬어지는 동몽골, 즉 바이칼호수에서 시작해 한반도로 연결되는 육로의 중심 지역이다.
동몽골은 한민족 뿌리찾기 뿐만 아니라 몽골과 칭기스칸의 뿌리를 찾기 위해서도 관심이 집중된 땅이다. 요즘도 종종 칭기스칸 무덤을 찾았다거나, 그것도 가짜였다거나 하는 기사가 신문지상에 등장한다. 내몽골에 가묘(假墓)가 있을 뿐, 칭기스칸의 진짜 무덤은 찾을 길이 없다. 미국이나 일본 등지의 학자들까지 동몽골을 뒤지며 묘를 찾고 있지만, 그의 진짜 무덤은 없을 가능성이 더 높다. 과거란 흘러가버린 바람에 불과했던 사람들에게 무덤이 남아있을 리 없다. 하지만 오늘도 수많은 학자들은 보르칸산을 오르내리며 그가 묻힌 곳을 찾아헤맨다.
동몽골은 칭기스칸의 죽음 때문이 아니라 탄생 때문에 찾아야 하는 곳이다. 대표적인 곳은 헨티 아이막(道)의 세 동네다. 첫 번째 ‘다달솜(郡)’. 울란바타르에서 동북동 방향으로 450Km나 떨어진 이곳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칭기스칸의 탄생지라고 말한다. 그의 탄생기념비도 이곳에 서 있고, 매년 그를 기리는 위한 제사도 이곳에서 지낸다. 다달솜에는 어린 시절 테무진이 적을 피해숨어들었던 푸른 호수가 있고, 물고기를 잡아 목숨을 연명했던 오논강이 흐르고 있다.
울란바타르에서 동북동 방향 400Km, 다달솜을 조금 못미쳐 있는 빈데르솜도 몇몇 학자들이 주장하는 칭기스칸의 고향이다. 오논강의 지류인 오논 하르흐강이 흐르는데, 그 앞에 있는 언덕이 칭기스칸의 탄생지로 불리는 ‘델리온 볼다크’이다. ‘델리온’은 몽골어로 소(牛)의 췌장을 뜻한다. 테무진이 태어났을 때 그의 어머니 허엘룬은 가난한 살림에 먹을 양고기가 없어서 소의 췌장으로 국을 끓여먹었다고 한다. 우리의 미역국처럼 그들에겐 양고기 국이 출산 후 처음 먹는 국물이다. 그래서 그 땅을 델리온 볼다크라고 부른다고 한다. 빈데르솜은 칭기스칸의 탄생지보다 몽골제국이 탄생한 곳으로 더 유명하다. 오논 차강 노르(오논강의 하얀 호수)가 옆에 있는데, 그 곳에 1206년 이곳에서 몽골제국을 건설했다는 비석이 서 있다. 칭기스칸 연구를 금지시킨 소련의 위성국가였을 때는 엄두도 못내다가 사회주의가 끝난 최근에 세워진 것이다.
울란바타르에서 동남동 방향으로 200Km에 있는 호두아랄 지역도 역사가 숨어있는 땅이다. 재미있는 것은 호두아랄에도 칭기스칸의 탄생지라 알려진 델리온 볼다크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달솜이나 빈데르솜에 비해 신빙성을 얻지 못하고 있다. 무덤을 찾지 못하는 것처럼 고향도 바람 속으로 사라져버렸다는 생각이 든다. 호두아랄은 칭기스칸의 셋째 아들이자 몽골세계제국의 제2대 칸이었던 어거데이칸이 몽골인의 거의 유일한 역사서 [몽골비사]를 쓴 곳이다. 몽골비사의 맨 마지막 절인 282절에 “쥐때해 7월, 호두아랄에서 쓰기를 마쳤다”는 기록이 있다. 몽골비사 집필 750주년을 기념하는 비석도 서 있다.
오늘의 우리에겐 역사이고 과거인 채로 기억되지만, 사실 동몽골은 매우 아름답고 비옥한 땅이다. 몽골의 대초원을 상상할 때 그려지는 그림의 대부분은 동몽골 지역이다. 큰 강이 흐르고 강 주변으로 나무가 자란다. 땅은 넓고 넓어서 42.195킬로미터 마라톤 코스를 둔덕 하나 없이 그냥 앞으로만 달리게 해도 될만큼 넓고 평평하다. 등에(쇠파리)가 괴롭히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지만 말을 달리기에도, 여행을 하기에도 그만한 곳이 없다. 봄이면 에델바이스가 초원을 가득 덮고, 여름엔 엉덩이 하얀 가젤(몽골의 야생 노루) 떼들이 수천마리씩 뛰어다닌다. 에델바이스를 부르는 몽골말은 ‘차강 오르 체첵(흰산꽃)’이다. 몽골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하얀색과 가장 경원하는 산을 합쳐서 부르는 꽃이름이니 얼마나 아름다울까?
칭기스칸도 자신의 고향을 좋아했던 것 같다. 동몽골은 칭기스칸에게 태어난 고향이자 어린 시절의 고통을 견뎌준 요람이었고 위대한 정복자가 되게 한 스승이며 다시 돌아와 휴식을 취하는 안식처였다. 칭기스칸에게서 볼 수 있는 많은 장점 중에서도 특히 백미인 것은 낙관론적 사고인데, 고통을 견뎌야 할 때마다 마음속에 고향을 두고 있었는지 모른다. 칭기스칸은 동몽골 고향에서 다시 힘을 얻어 새로운 준비를 하고, 새로운 돌파구를 열어간다. 칭기스칸이 역사에서 돌연 사라져버린 7년의 공백기가 그 기간이다.
세력도 없고 재산도 없던 칭기스칸이 아내를 약탈당했을 때, 그는 고원의 양대 실력자였던 옹칸과 자모카에게 도움을 청했다. 아내 구출전쟁에서 승리했지만 전리품도 제대로 챙길 수 없었다. 궁리 끝에 칭기스칸이 생각한 것은 자모카의 배속에서 사는 길이었다. 공동유목을 요구했고 2년간 자모카의 비호 아래 힘을 키울 수 있었다. 2년 후 칭기스칸은 독자적 행보를 찾아 자모카를 떠났고, 그때는 이미 수많은 지지세력을 얻은 후였다. 그러나 그들은 오합지졸에 불과했다. 고원통일은커녕 제몸뚱이조차 건사하기 어려운 난민 집단이었다.
그때 칭기스칸은 내적 준비를 위해 역사 무대 밖으로 사라졌다. 동몽골 초원에 자리를 잡은 그들은 7년간 사냥과 훈련을 통한 전투 기술 배양과 새로운 사회 시스템을 완성시켜 나갔다. 그들이 타타르족을 정벌하기 위해 다시 역사의 중앙에 등장했을 때, 칭기스칸 군대는 세계를 재패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손짓 하나로 사람은 물론 수천마리의 말까지 숨소리하나 없이 매복시킬 수 있는 체계적인 군대를 가지고 있었다. 개인적 약탈이 없고 모두가 공평하게, 능력껏 나누어 갖는 사회가 만들어져 있었다. 그 길로 칭기스칸 군대는 세계 정복으로 내달렸다.
몽골을 여행해본 사람들은 자신과 꼭닮은 몽골사람들 때문에 놀랬다고 말한다. 그런 놀라움은 동몽골에가면 더 커진다. 우리와 혈통적으로 가장 닮은 민족은 몽골족 중에서도 브리야트족과 예벤키족이라고 한다. 예벤키족은 바이칼호수 주변에 살고 있고, 브리야트족은 동몽골에 주로 살고 있다. 브리야트족은 혈통적으로만 비슷한 게 아니다. 그들 속담에 “싸움이 없는 잔치는 잔치가 아니다”란 말이 있다. 술을 마시면 취할 때까지 마셔야 하고, 흥청거리다 못해 싸움까지 벌어져야 진정한 잔치였다고 자랑스러워하는 것이다. 정에 이끌려 사는 품새도 꼭 우리와 닮았다. 이러니 우리 민족의 뿌리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는 나로서는 동몽골 초원길을 따라 한민족이 이주해 내려왔다는 말에 귀가 솔깃해지는 것은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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