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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의 종교, 샤머니즘과 라마교 (한국 종교학 전공자 논문)

몽골승마클럽 2006. 12. 22. 19:30

Ⅰ. 몽골샤머니즘과 라마교의 접촉 : 역사적 배경


몽골샤머니즘과 라마교의 접촉은 무엇보다 ‘정치적’ 동기에서 이루어졌다. 이것은 우선 역사적 맥락에서 이들의 만남을 분석해보면 잘 드러난다. 이런 맥락은 티베트불교의 영향에 기인한 몽고샤머니즘의 역동적 변화가 갖는 구체적 성격을 결정짓고 있다.


1) 1차 접촉


13세기에 이루어진 원대(元代, 1260-1368)의 몽골과 라마교의 1차접촉부터, 몽골인의 정신적 필요에 근거한 것이라기보다는 정치적인 성격을 띄고 있다.(Heissig, 24) 이에 반해 박원길은 원조(元朝)가 다른 여타종교들 가운데서 티베트 불교를 선택한 원인을 티베트불교가 갖는 밀교적 성격이라고 결론내리고 있다. 즉 티베트불교가 불교의 여타종파가운데서 가장 현란한 색채를 가진 밀종(密宗)이어서, ‘적막한 대초원에서 생활하는 유목민족들의 심리에 비교적 강하게 어필하고 있다’(박원길1998, 345)고 보는 것이다. 나아가 원대 초기 세조 쿠빌라이칸(Khubilai Khan, 1215-1294)을 비롯한 다수의 몽골 제왕들이 라마교에 귀의한 원인에 대해서도 ‘불교가 이슬람교보다 먼저 궁중에 세력을 부식했기 때문이라고’(356) 보고 있다.  이러한 이해는 불교를 수용한 당시의 몽골왕조와 티베트불교를 둘러싼 정치적 이해관계를 간과한 것이다. 사실, 티베트불교의 적극적으로  수용한 것은 정치적인 사건이었다. 

1239년 동부티베트의 캄을 거쳐 겔라칸을 초토화시킨 오고타이 칸의 아들인 쿠텐(Godan)왕은 협상을 위해 티베트의 사자(使者)로 그에게 온 사캬파(薩迦派, Sa skya-pa)의 대표적 학자인 ‘사캬 판디타(Sa Skya Pandita)'와 만나게 된다. 사캬파는 토번시대이래의 명문가로서 밀교(密敎)적 경향이 강한 고파(古派)인 닝마파(rNying mapa)에 가까우며, 후대의 홍모파(紅帽派)에 해당한다. 한편 사캬판디타는 가혹한 공납조건을 부과하는 쿠텐에게 저항하기보다는 복종하면서 교화하는 방법을 택했다.(山口瑞鳳, 70) 그리고 인질로 몽골왕실에 남은 그의 조카인 팍파(Phagspa)는 元의 왕실과 지배층을 중심으로 라마교를 전파하는 데 성공하게 되었다. 그는 쿠빌라이 정부에서 도교와의 논쟁인 두차례에 걸친 2차의 공중토론에서 뛰어난 논쟁술로 도교를 제압함을 결정적인 계기로 황제의 신임을 얻은 결과 팍파는 제사(帝師)이자 국사(國師)로 임명되어 특혜를 받게 되었고 나아가 사캬파의 승려들은 황실에서 정신적 조언자로 기능하게 되었다. 야자키 쇼켄(矢崎正見)은 ‘티베트불교교학과 정치권력으니 상호연관성을 고찰’(山口瑞鳳․矢崎正見, 176)하는 맥락에서 쿠빌라이로부터 티베트에 대한 통치권을 부여받아 사캬왕조의 창설자가 된 팍파의 활동에 대해 ‘원조라는 권력과의 영합이며’(177), 순수한 불교인으로서의 실천태도라고는 말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여러 가지 이론적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덧붙여 그 결과, 티베트불교교단은 쿠빌라이에서 成宗 테무르로 이어지는 기간동안 몽골왕실에서 보호받게 되었으며, 특히 팍파는 그의 정치적 힘에 의해 티베트전역을 지배한 元왕조의 티베트에 대한 과다한 세금징수나 형벌의 적용, 군대징용 등을 막을 수 있었다.(71) 나름의 정치적 이익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한편 쿠빌라이가 불교를 국교로 지정하여 장려한 것도 매우 정치적인 것이었다. 『유목민족제국사』를 저술한 룩 콴텐은 그의 목적이 정치적인 것이었다고 단언하고 있다.(룩 콴텐, 338) 쿠빌라이가 티베트불교에 특권을 준 것은 첫째, 국내정치에 있어서는 주민의 통치와 제국의 안위를 위한 정치적 조치였다. 즉 ‘심각한 반란의 위협세력이었던 비밀결사들이 불교에 뿌리를 두고 있었으며, 승려들은 지방주민과 많은 지방관리들의 신임을 획득하고 있었기’(338-9) 때문이다. 둘쨰, 대외적인 면에서 쿠빌라이는 바로 이 팍파를 그의 수하에 둠으로서 광대한 티베트영토를 최소의 군사력으로 지배할 수 있었다.(252)

결과적으로 몽골황제들은 티베트불교를 장려함으로서 티베트에 대한 정치적 지배를 쉽게 할 수 있었고 ‘티베트의 신속(臣屬)을 확고히 할 수 있었으며’(Grusset, 430), 티베트측은 원왕조에 대해 속국임에도 정치적 발언권을 가질 수 있었다.  몽골과 라마교의 1차 접촉안에는 이러한 정치적 목적이 함축되어 있었다.  



 2. 2차 접촉


2차접촉 역시 1차접촉의 성격과 크게 다르지 않다. 오히려 ‘정치적’ 성격이 보다 강화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2차접촉의 원인은 다각도에서 지적되고 있다. 먼저 하이지히(Heissig)는 명대(明代)의 중국에 원인이 있다고 보고 있다. 몽골왕실이 중국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여전히 특권을 누렸던 라마승려들이, 16세기초반 명황제에 의해 박해를 받게 되자 몽골로 이동하게 됨으로서 몽골이 다시 라마교와 접촉하게 되었다는 것이다.(25) 하지만, 2차접촉의 이루어진 것은 결정적으로 칸위를 얻고자 하는 알탄칸(Altan Khan)과 티베트불교 중 황모파(黃帽派)로 불리는 겔룩파(格魯派, Dgelugs-pa) 양측의 정치적 필요가 상호작용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라마교와의 새로운 접촉 역시 정치지도자들에 의해 주도되었으며, 라마선교의 본격적 재기는 투메트(Tümet)部의 군주 알탄 칸에 의해 시작되었다. 박원길은 알탄칸이 라마교를 적극수용하게 된 계기를 잘 분석하고 있다. ‘다얀칸(Dayan-Khan, A.D. 1480-1517)은 봉건영주간의 내란을 종식시키고 북원(北元, 1368-1634)을 결속시킨 이후, 귀족들의 봉토를 재편성하는 한편 칸위계승을 둘러싼 분쟁을 방지하고자 황태자(皇太子)에게 칸위를 계승하는 지농(濟農, Jinong)제를 신설했다. 그런데 이것은 투베트부를 맡아 곧 몽골의 최고실력자로 부상하게  된 알탄칸이 칸위를 계승하지 못하게 만든 원인이었다. 더군다나 알탄칸의 위세에 칸에 올랐던 다라이손(Daraisun, A.D. 1548-57)이 좌익을 이끌고 오랑캐지구로 동천한 상황에서 알탄칸은 사실상의 지배자였는데도 말이다’(364) 

이렇게 실세이면서도 장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칸위에 승극하지 못했던 알탄칸은 그의 칸위승계를 가능케 할 무엇인가가 필요했으며, 그것이 바로 라마교의 윤회론이었다. ‘알탄칸은 소드남가쵸(Bsod-nam rgya-mtsho)와 존호를 주고 받았는데, 이 때 알탄칸이 소드남가쵸를 쫑카파 대제자의 세 번째 환생으로 인정하여 제3대 달라이라마라는 존호를 준 것은’(365) 곧 정치적 최고권의 계승이 ‘환생’이라는 불교적 원리에 의한 것이지 장자계승의 원칙이 아님을 선포하는 것이었다. 즉 그의 칸위계승을 방해하는 지농제를 전면부정한 것이었다. 나아가 소드남가쵸는 겔룩파의 화신설을 통해 알탄칸이 쿠빌라이칸의 환생이라고 인정해줌으로써, ‘칸위계승을 정당화하는 이론적 근거를 확실히 제공해 주었다.’(박원길, 365) 즉 불교의 윤회론에 기반한 황모파(黃帽派)의 화신설이 알탄칸의 정치적 권위를 정당화시켰고 그 결과 라마교가 알탄칸의 후원하에 몽골지구로 급속히 전파될 수 있었던 것이다. 

나아가 티베트에게도 몽골의 개종은 중요한 정치적 의미를 가진 것이었다. 15세기초 쫑카파(宗喀巴, Tsong-kha-pa)에 의해 창시되어 급격하게 성장하던 황모파라고 불리는 겔룩파는 티베트의 강력한 지역인 짱(Tsang)의 왕의 후원을 받는 홍모파의 위협에 직면하게 된다. 그래서 그들은 거대한 군대를 가진 몽골세력을 정치적 지원자로 삼기위해 몽골과 결합했다. 겔룩파는 15세기 초 좌도밀교(左道密敎)로 치닫게 된 홍모파교단의 퇴폐풍조를 개혁하고자 독신, 금주, 금육, 그리고 엄격한 수도원 생활을 강조하는 계율중시주의적 불교부흥운동을 일으켜 전통적인 불교적 생활방식으로 복귀할 것을 주장한 쫑카파의 정신을 담고 있다.(Ch'en, 228;山口瑞鳳․矢崎正見, 92-95) 그렇다고 탄트라불교의 실행을 완전히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또한 겔룩파는 쫑카파의 3대계승자인 게둔 룹파(dGe-Idun-grub-pa)의 ‘화신설(化身說)’로서 특징지워질 수 있다. 이 교의에 따라 종파의 지도자인 대 라마는 탄트라의 대표적 신령이자 티베트의 수호신인 관세음보살의 화신으로 간주될 수 있었고, 그 결과 정치적․종교적 권위를 보장받았다. 바로 이 화신설이 알탄칸과의 정치적 결합을 가능케 한 교의였던 것이다.

어쨌든 앞에서 언급한 대로 제3대 라마가 몽골의 알탄칸과 만난 데에는 단순한 신앙전파의 목적이 아니라 이런 정치적 목적이 깔려있었다. 그리고 이런 정치적 의도는 티베트불교의 몽골전파가 지속되는 과정속에서 계속 이어졌다. 이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은 겔룩파가 3대 달라이 라마의 화신인 4대 달라이 라마로 알탄칸의 동생이자 칼카(Khalkha) 몽골왕의 아들인 융텐 강쪼를 지정한 것이다. 이 사건의 배후에는 홍모파인 카르마파(派)세력을 경계하는 겔룩파의 정치적 의도가 깔려있다. 겔룩파는 이를통해 몽골와의 동맹관계를 보다 확고히 하여 투메트 부 몽골인의 군사력을 확보하려 했다. 그런데, 1630년 겔룩파를 지지하는 오르도스와 투메트가 카르마파와 가까운 몽골부족에게 패배하자, 곧 겔룩파는 오이라트의 호슈트部와 제휴했고, 라마교 신자였던 호슈트의 구스리 칸(Gusri khan)은 즉시 신성동맹을 맺고 홍모파의 세력을 소탕했다. 그 결과 달라이 라마가 소속한 겔룩파가 몽골에서 정통불교로서 정치적 종교적 지배권을 독점하게 되고,(山口瑞鳳, 92-5) 구스리칸은 세속적 지배자로서 티베트왕의 칭호를 갖게 된다.  ‘구스리 칸은 후원자로서 성직자의 종교적 지위를 보장해 주었고, 한편 성직자는 후원자의 세속적 지위를 지지해 주었다.’(Ch'en, 230)  이후 몽골의 투메트 부와 오르도스부를 시작으로 몽골의 전영역으로 라마가 전파되기 시작했다.

따라서 몽골의 적극적인 라마교 수용과 티베트측의 적극적 전파를 낳아 샤머니즘의 변화를 결정적으로 초래한 2차접촉은 첫째, 겔룩파의 라마교의 화신설이 알탄칸의 칸위계승을 위한 사상적 배경을 제공해주었다는 결정적 사실과 이후 라마교와 몽골칸들 사이에 정치적 후원자가 되고 세속적 권위를 부여하는 성직자로서의 이해관계가 확립되었다는 사실 등에 기반한다. 이후의 다른 지역들의 몽골칸들이 라마교를 수용한 것도 대부분 정치적 목적에서였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북몽골의 라마교전파도 칼카의 아바다이 칸(Abadai Khan)이 그의 정치세력의 증대를 위해 달라이라마와 만남으로서 시작되었다. 또한 몽골에서의 라마교지배를 더욱 확고히 한 만주왕실도 중국의 정치적 지배를 위해 라마교를 국가적으로 지지한 것과 마찬가지로 정치적 통치를 보다 용이하게 전개하기 위해 라마교를 지지했고 나아가 라마교가 신학적인 면에서 티베트과 연결되었음에도 몽골의 라마교단을 티베트으로부터 행정적 정치적으로 분리시켜, 북경에서 통치하려 하였던 것이다. (Heissig, 33-34) 

Ⅱ. 라마교 전파 - ‘박해’와 ‘융합’


몽골샤머니즘과 라마교의 만남은 ‘강압적인 박해’와 보다 온건한 ‘융합’이라는 두가지 방식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 두가지가 동시에 이루어짐으로서, 몽골샤머니즘은 라마교의 사상과 깊게 관련맺게된다. 몽골샤머니즘의 변형이 주로 2차접촉을 계기로 시작되었기 때문에, 이 부분에서는 1차접촉은 간략히 살펴보고 주로 2차접촉의 분석에 초점맞추고자 한다.


1. 1차접촉의 성격- 사캬파와 元代


우선 1차접촉시의 라마교전파는 지배층에 한정된 것이며, 앞서 살펴본 바대로 정치적 의도가 강했기 때문에 종교적 선교에 초점 맞춰진, 혹은 깊은 종교적 이해에 근거한 개종이 아니었고, 대중의 샤머니즘실행과는 직접 접촉하지도 않았다. 일단 사캬파와의 관계가 낳은 종교적 영향을 간략히 살펴보자면, 첫째, 무서운 모습의 ‘마하칼라(Mahakala)'와 수호신 ‘Hevajra'같은 라마교의 신들이 숭배되었다. 이들의 악마적 특성은 몽골의 지역신을 능가하는 것으로 의례도 끔찍한 희생제의였다. 또한 이들은 몽골인들의 정치적 역동성과 군사적 성질에 맞는 면이 있었다.(Heissig, 25)  또한 사캬파의 중심교리라고 할 수 있는 밀교의 탄트리즘의 영향을 받았다. 그런데 이것은 원황실에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 즉 지배층은 이런 탄트라실행이 갖는 깊은 종교적 의의 즉 깨달음의 지향을 깨닫지는 못했다. 즉 밀교의 성적 합일의 의미는 알지 못한 채, 다만 성교자체를 탐닉했다. 이런 부정적 영향은 몽골의 중국왕조붕괴의 중요한 영향 중 하나가 되기에 이르렀다.

한편 1차접촉에서 몽골샤머니즘과 티베트불교의 접촉은 지배층의 권력과의 밀접한 관련하에 제사를 주관하거나 국가중대사에 앞서 점술을 행했던 ‘왕실샤만’과 탄트라의 밀교적 성격이 강한 사캬파의 라마승이 만남으로서 이루어졌다. 그래서 주로 치료기능과 주술적 기능에 한정된 대립이었다. 즉 지배층을 중심으로 승려들이 보여준 의술과 탄트라의례의 주술적 효과에 자극받은 결과, 왕실에서 활동하던 몽골인 샤만들이 사캬파와 겨루게 되는 수준의 것이었다. 또한 지배층의 샤머니즘을 대변한 왕실샤만에 국한된 접촉이었으며, 대중에 뿌리박힌 몽골샤머니즘전체와 맞닿지는 않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또한  지배층에 있어서도 티베트불교를 라마교로 선포하긴 했지만 지배층의 샤머니즘실행이라고 할 수 있는 국가제사나 명절, 절기 등의 준수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었다.(박원길, 337) 이것은 1차접촉의 정치적 성격에 기인했다고도 볼 수 있을 것같다.  따라서, 몽골의 중국지배가 붕괴된 후, 라마교의 영향은 거의 남지 않았고(Heissig, 25)  몽골의 샤머니즘도 크게 변형되지 않았다.


2. 2차접촉


몽골의 샤머니즘이 본격적인 박해와 변형에 직면하게 된 것은 겔룩파와의 2차접촉부터였다. 우선 이러한 전파와 변화의 구체적인 과정을 분석하기 전에, 현재 이러한 라마교의 영향이 몽골샤머니즘체계안에서 뚜렷이 남아있다는 사실을 전제할 필요가 있다. 현대의 몽골학자들은 현대의 샤먼현상을 라마교전파이전 고대샤머니즘의 형태를 기준으로 ‘황(黃)샤먼’과 ‘흑(黑)샤먼’으로 나누고 있다. 즉 라마교의 세계관을 인정하고 불교적 의식과 혼합했으며, 과거에 라마승의 지배를 받기도 했던 샤만이 황샤만이다. 라마승이 통제하는 무당자격시험같은 것을 치르기도 했다고 한다. 반면, 불교의 세계관을 수용하지 않았고, 몽골의 전통샤머니즘을 보존한 샤먼을 흑샤먼이라고 한다. (어트거니 프레브a 14; 데르 마르하호a 128) 데르 마르하호에 따르면 이런 흑샤먼신앙은 집안의 중심이자 초원의 중심인 엉거트 숭배를 특징으로 하며(데르 마르하호b, 42) 몽골샤머니즘의 제사의식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데르 마르하호a, 128) 그런데 이들은 어느정도 지역적 구분을 보여준다. 즉 황샤만은 외몽골대부분의 지역과 부리야트의 일부지역에서 널리 발견되며, 흑무당은 외몽골의 소수지방과 시베리아지역무당에 주로 분포되어 있다.(어트거니 프레브, 14) 라마교의 영향력이 큰 지역과 그렇지 않은 지역이 어느정도 나눠지기 때문일 것이다. 숫적으로는 황샤만 즉 라마교를 수용한 샤먼이 많다고 한다. 이런 전제하에 이 장에서는 라마교전파에서 나타난 두가지 성격을 중심으로 몽골샤머니즘와 라마교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1) 박해와 대체- ‘엉거트(Ongghot)’와 ‘샤먼’


2차전파는 첫째 지배층의 적극적 후원을 받은 황모파에 의해 이루어진 박해의 성격을 띄고 있다.  처음에는 황모파만이 존재한 것은 아니었다. 하이지히에 따르면, 원왕조때의 홍모파의 영향력이 여전히 남아있었다. 하지만, 칼카(Khalka)의 왕이 황노파를 결정적으로 지지하고 1634년 만주족이 이 파를 선호하게 됨으로서 결정적으로 황노파가 몽골을 장악하게 되었다고 한다. (Heissig, 28, 31)

 한편 칸들은 적극성을 띄고 라마선교사들을 후원했다. 강제성을 띄고 젊은 귀족들을 승려로 임명하여 왕실과 관료정치의 일원이 라마교적 생활방식을 취하게 되었다는 것은 칸들의 지지를 잘 보여준다. 이들 칸들은 살생을 금지하고 샤만적 실행을 금하라는 달라이라마의 뜻을 반영하는 라마교전파를 보장하는 법을 선포, 시행했다. 이 법의 주요한 내용은 장례식이나 희생제의의 재물로 인간이나 동물을 죽이는 것이나 모든 종류의 유혈의식(blood-offering)을 금지하는 것과 몽골샤마니즘실행의 주요한 신상인 ‘엉거트'의 소유를 불법화하고 대신 라마교의 보호신인  ‘마하칼라(Mahakala)’상을 몽골인의 천막(yurt)에서 숭배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불법의 수호신령이며’(486) 금욕주의자들에 의해 중요한 신으로 인정받았던 마하칼라가 무엇보다 중요시 되었던 것은, 겔룩파가 금욕과 불교교리의 공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는 사실과 연결지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이후의 라마교전파과정의 기본적인 노선의 핵심이 곧 즉 ‘엉거트와 샤만탄압’ 임을 보여준다.  

박해의 주요대상이 된 ‘엉거트’는 실제로 두가지 의미에서 몽골샤머니즘의 중심이었다. 첫째, 이것은 샤먼이 의례를 통해 부르는 보호령으로서의 조상령이다. 샤만은 의례나 다른 샤먼적 실행을 통해 엉거트와 교류한다. 접신한 상태의 샤만은 ‘엑스타시와 발작적 전율’로 특징지워진다.(Heissig, 10) 이것은 현대의 몽골샤먼들에게서도 보여진다. 어트게니 푸레빈에 따르면,  현대의 흑샤만과 황샤만 모두 이 엉거트에 들려(어트거니 푸레빈, 64) 샤만에 입문하며, 접신 혹은 엑스타시상태에서 전율에 의해 졸도하는 현상이 자주 나타난다고 한다. 둘째, 엉거트는 이런 보호령이 구현된 신상(神像) 혹은 신체(神體)이다. 12-13세기부터 몽골인의 텐트입구에 모셔진 채 몽골인들의 숭배를 받았던 신앙의 핵심적 대상이었다.

이러한 ‘엉거트’ 중심의 샤먼적 실천은 엉거트신령과 접신한 샤먼의 엑스타시를 특징으로 하는 ‘엑스타시적 샤머니즘’이라고 할 수 있다. 박해는 주로 엉거트신상을 모시며 일반 몽골인들사이에서 활동하는 샤만과 엉거트신앙에 대한 일반인들의 샤먼적 신앙에 대해 가해졌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라마교는 달라이라마의 주도아래 무엇보다도 ‘정치적으로 그리고 경제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평민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Samuel, 148) 몽골샤머니즘현상 가운데 몽골평민들의 고유한 신앙의 중요한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엉거트를 불태우고, 엑스타시적 의례와 주술, 치유의 기능 등으로 이들 평민들의 신앙과 삶을 주도하던 샤먼을 박해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래서 라마교는 이런 박해과 회유의 방식을 통해 남몽골부족, 북몽골, 릭단칸에 의해 주도된 동몽골 등으로 전파되었고, ‘마지막까지 대다수국민들이 샤머니즘의 영향아래 엉거트를 숭배하던 동몽골의 일부 지역’(Heissig, 31-32)도 코르친(Khorchin) 지역의 왕의 주도로 지배자계층의 압도적 지지를 받으며 대대적인 샤머니즘의 탄압을 거쳐 라마교가 전파되게 되었으며 새로운 만주정권이 등장하여 정치적인 목적으로 라마교를 장려한 결과 더욱 라마교가 우세하게 되었다.

탄압의 구체적 내용을 살펴보면,  먼저 샤머니즘을 이단이며 거짓종교로 단정하고 샤만들이 여러 텡거리들과 엉거트 등의 신령을 전파하는 것을 금지했고 라마교의 교리나 기도문을 배우도록 했다. 이런 박해는 이들 신령이 ‘영원한 구원을 방해한다는 명목으로 이루어졌다.(37) 칸들은 엉거트숭배를 중지시키기 위해, 엉거트를 내놓고 라마교교리를 배우는 몽골인들에게는 가축 등을 대가로 주었고(36-7) 반대로 엉거트를 계속 숭배하는 사람에게서는 가축을 빼앗기도 했다.(38) 이것은 많은 몽골인들이 표면상으로나마 샤머니즘신앙을 포기한 실질적 원인이 되었다.  동시에 라마승들은 전국을 돌며, 이 ‘거짓종교’를 없애기 위해 신상과 샤만의 무구를 거둬들여 태워버렸다.

  한편 이러한 ‘소멸’을 목표로 하는 박해는 이에 대한 대체물을 몽골인들에게 제공한다.  이러한 대체는 라마교가 ‘인도와 티베트의 샤머니즘적 토착신앙인 본교의 고대주술적 실행을 신학적으로 체계화한 부분인 탄트라(tantra)의 영역을 통해’(39) 이루어진다. 즉 이러한 민간의 샤머니즘에 대한 라마교선교는 라마교의 탄트리즘이 갖는 다음과 같은 특성들에 기인한다.

탄트리즘에는 가장 높은 것으로 깨달음을 얻기 위한 요가절차체계로서의 측면이 있는가 하면, 세속적인 목적으로서 주로 정화, 건강, 부의 축적, 적의 파괴, 위험한 영향력으로부터의 보호 등 여러 가지 주술적이고 일시적인 목표를 위해 사용되는 보다 대중적 실천과 연관되는 부분도 있다. (Samuel, 230-2) 이것은 티베트종교가 갖는 실용적인 지향의 중요한 부분이다. 따라서, 라마승들은 탄트라수행을 통해 얻은 영적인 힘을 속세의 대중을 위해 사용한다. 이것은 라마교가 갖는 대승불교로서의 특성에 기반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라마승은 깨달음의 수행과 함께 본질적으로 샤만적 기능을 수행하고 있었다. 라마승의 능력은 탄트라신령과 접촉하는 그들의 주술적 능력에 달려있다.(163) 나아가 독특한 주술력으로 특정한 병에 대응하여 의례를 실행하는 뛰어난 치료능력을 가지고 있었다.(268) 또한 라마승들은 본교로부터 뛰어난 축귀술을 수용하여 수많은 악마와 정교한 형태의 축귀의식을 가지고 있었다(Vitebsky, 1995). 특히 지역신이나 신령들을 다룸에 있어 보다 중요한 신들을 보호자로서 합치고 탄트라의례의 힘을 통해 그 외의 신들은 파괴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라마승의 정체성은 이런 탄트라실행을 잘 하느냐 못하느냐에 달려있기도 했다. 라마교전파의 주요한 세력이었던 겔룩파 역시 교리적 측면을 강조하긴 했지만 탄트리즘의 대중적 실천이 갖는 의의를 부정하지 않았고, 라마승의 탄트라적 주술력도 그대로 수용했던 것 같다. 실제 겔룩파는 본교의 핵심제도인 ‘신탁사원제도’를 겔룩파의 모든 중요한 사원들에 다시 도입하여 일반신도의 간구와 기원을 받는 본교의 샤먼적 신령들을 모셨다고 한다. 

이런 라마승들의 주술과 치료, 혹은 축귀의 능력은 몽골의 귀족과 왕실계층을 흡수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전통적인 샤머니즘실행을 지속하기 힘든 상황에 처한 일반 몽골인들이 대신 라마교에 관심을 갖고 끌리게 할 수 있는 중요한 요소였다.  즉 라마교신령에 의한 몽골엉거트의 대체와 라마승에 의한 몽골샤만의 대체 등으로 이루어지는 몽골샤머니즘의 기능의 대체는 라마교가 갖는 밀교부분이 갖는 샤머니즘적 기능들을 통해 이루어졌다.

대체의 구체적 내용에 대해 알아보면, 먼저 ‘엉거트’는 부처상이나 ‘마하칼라(Mahakala)’같은 탄트라 신령에 의해 대체되었다. 또한 탄압받은 샤먼의 기능은 라마승이 대신한다.  샤만을 대신하는 라마승에는 라마승에 가장 가까운 형태로 명상수행과 고행을 통해 얻은 주술력으로 존경받은 디얀치 라마(diyanči),  몽골엑스타시샤먼의 기능인 엑스타시나 접신, 축귀, 점술 등을 ‘라마교리체계안에 적용한’(41) 결과 나타나, 라마교사원내에 거주하며 샤먼을 대신했던 구르텀(gurtum) 라마,  구르텀이 약화된 형태로 평민으로서 샤먼을 대신한 20세기에 동몽골에서 발견된 라이칭(Layičing)등 3가지 형태가 존재했다고 한다.(Heissig, 41-2) 하이지히의 분석(43)을 참고하면, 이들 특히 구르텀라마와 라이칭이 각각 라사(Lhasa)에 있는 국가제사장격의 ‘쳐스 경Chos Skyong'과 '나스청 gNas chung'의 변형이며, 이것은 곧 라마교 측이 의식적으로  본교로부터 수용한 엑스타시적 형태의 제사장을 샤먼대신으로 소개했음을 보여준다. 또한 ‘구르텀라마가 사원에 있음으로서, 사원이 큰 명성을 얻을 수 있었고, 사원에 일반신자들이 더 많이 찾아왔다는 사실’(41)로 미루어볼 때, 이러한 라마교의 의도는 성공적이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덧붙여 1942-3년에 발견되는 라이칭의 경우 라마교사원의 통제를 받긴 하지만, 라마승이 아닌 평민이 라마승을 대신해 샤먼의 기능을 대체했다는 면에서, ‘라마교가 샤머니즘을 보다 더 용인하게 된 시기의 형태로, 이후 라마교적인 샤먼으로 가는 과도기적 형태라는’(43) 하이지히의 지적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현대의 몽골학자들이 지적하는 라마화된 샤먼인 ‘황샤먼’과 연결시켜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샤먼의 무가가 금지되는 대신 라마교의 주술적 제문(dharani)과 축귀를 위한 기도문이 사람들사이에 배포되었다. 이것은 몽골인들이 샤먼없이 스스로 축귀의식을 할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실제로 일반대중사이에서 나름의 효력을 볼 수 있었다. 여기서 이런 제문의 내용을 통해 보면, 이것이 샤머니즘적 보호와 함께 ‘극락(Sukhavati)에서의 환생’(39)을 위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샤머니즘적 종교이상과 함께 불교적 이상이 제문에 첨가 민간에 보급되었기 때문에, 이것은 단순한 대체에서 나아가 라마교적 구원관을 민간에 심는 역할도 자연스럽게 할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뿐만 아니라 특정한 보호신령과 일치할 수 있다는 탄트라교리가 라마교전파에 크게 기여했다. 하이지히는 몽골인들이 조상수호신령이라는 개념을 가져서 이런 교리에 친숙할 수 있었다고 본다. 실제로 이런 방식이 몽골인들이 진심으로 엉거트를 중심으로 한 그들의 전통적 샤머니즘 신앙을 버리게 하는 데 성공했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이런 구체적 요소들이 지역에 따라 차이는 있을 지라도 라마교의 대중적 수용에 기여했을 것이라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상의 고찰을 통해 보면,  몽골의 샤먼적 민간신앙에 대한 박해는 주로 ‘샤먼과 엉거트의 파괴에 초점을 두고 이루어졌으며, 지배층의 적극적인 후원을 입고 몽골전역에 걸쳐 진행되었다. 그리고 라마교는 샤먼을 잃은 몽골대중에게 라마교자신이 갖는 탄트리즘의 샤머니즘적 요소를 통해 대체물을 제공했으며, 일단 민중의 관심을 끄는 데 성공했다고 평가해 볼 수 있다. 하지만, 엉거트를 태우고, 샤먼을 탄압한다고 해서 라마교가 의도한 ‘거짓종교의 종말’이 이루어졌던 것은 아니다. 즉 이런 박해가 실질적으로 몽골인들의 뿌리깊은 엑스타시적 샤머니즘신앙을 완전히 없애는데 성공한 것은 아니다. 하이지히는 ‘샤만들이 불교적 어구를 받아들이고 불교적 신성을 함께 모시는 등’ 유연성을 발휘해서 대처했기 때문에  라마교로부터 전통적인 샤마니즘형태를 위장함으로서 탄압으로부터 샤먼신앙을 지킬 수 있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이러한 평가는 현대의 분석속에서도 몽골샤머니즘의 실천안에 여전히 샤먼과 엉거트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볼 때, 타당하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현대의 몽골학자인 데 마르하호는 몽골샤머니즘을 엉거트신령을 중심으로 한 엑스타시적 접신체험으로 보는 입장에서 19-20세기의 샤먼체험을 기록한 자료를 토대로 샤만들 스스로가 말하는 엉거트를 분석했는데, 그 결과는 샤만은 여전히 존재하여 엉거트의 초자연적 힘과 관련맺음으로서 예언이나 육체적 힘 등 신통력을 갖게 되며, 엉거트의 신령이 하나의 실체로서 활동하며 몽골샤머니즘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그렇다고 해서 몽골의 샤머니즘이 전혀 변화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물론, 샤만과 엑스타시, 엉거트신령에 대한 신앙은 여전히 남아있다. 특히 흑샤만과 황샤만 모두 무당이 되는 길은 신(엉거트)에 들리는 것이라는 (어트거니 푸레브b, 64) 어트거니 프레브의 지적을 통해 이런 사실은 더욱 지지받는다. 그러나, 나아가 현대 몽골학자들이 지적하듯이 불교적 세계관과, 신령관, 의례체계에서는 분명 변화를 보였다. 그래서 라마교를 수용하지 않고 고대의 형태를 보존한 것은 소수에 불과한 ‘흑샤마니즘’의 경우일 뿐이며 대부분의 경우는 ‘라마교’의 영향을 수용 ‘황샤마니즘’의 성격을 띄게 되었다. 이러한 변형은 박해와 함께 이루어진 보다 온건하지만 지속적인 ‘융합’을 통해 이루어졌다.  

  

2) 융합과 계승, 그리고 변형 -  ‘신령체계’, ‘세계관’ 그리고 ‘오보제’


한편, 라마교전파는 이런 강제적 박해와 함께 동시에 융합적 경향을 보이고 있다.  박해는 주로 민중을 중심으로 한 엑스타시적 샤머니즘의 실천에 가해진 데 비해, 여러 학자들의 의견을 종합해보면 보다 온건한 ‘융합’으로서의 선교는 지배층의 샤머니즘 등을 포함하여 몽골샤머니즘전체를 규정짓는 신령체계와 세계관의 변형, 그리고  엑스타시적 굿을 제외한 의례적인 실행의 부분에서 이루어졌다. 이것은 박해와 대체보다 훨씬 지속적인 영향을 남겼으며, 오늘날 몽골샤머니즘현상속에 드러난 ‘흑샤만’과 ‘황샤만’의 구분은 오히려 이러한 온건한 그러나 보다 지속적으로 몽골샤머니즘 전체에 영향미친 변형의 결과라고 봐야 할 것이다.

우선 구체적인 변형의 내용을 살펴보기전에, 주로 이런 보다 온건한 방식의 융합적 전파의 대상이 되는 유형의 몽골샤머니즘, 그리고 이것과 앞서 주로 박해의 대상이 되었던 엉거트중심의 엑스타시적 샤머니즘의 관계에 대해 논의할 필요가 있다. 일반대중에게 주로 호소력을 가졌던 엑스타시적 성격의 샤머니즘과 함께, 주로 왕실에서 정치권력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특히 최고신인 ‘텡그리’를 숭배대상으로 하는 형태의 샤머니즘현상이 있었다. 제국형성이전 그것은 주로 씨족샤만과 같이 정치적 종교적 기능이 복합된 형태로 특징지워지며, 제국형성이후 즉 징기스칸이 몽골제국을 확립한 이후부터는 주로 샤만이 아닌 지배층의 사람들에 의해 수행되는 탱그리들에 대한 제사의식이나 산에 대한 오보제의 형태로 변한 경향이 있다. 몽골샤머니즘에 대한 여러 논문을 발표한 서양학자인 험프리의 분석에 따르면 이것은 정치적인 권력과 긴밀한 관계속에 있는 ‘가부장적’ 성격이 강한 형태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Humphrey 1996, 196) 나아가 박원길은 이런 형태의 ‘지배자의 가치체계’(박원길 256)로서의 몽골샤머니즘을 곧 몽골샤머니즘의 주흐름이라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박원길의 시각처럼 이런 유형이 몽골샤머니즘의 주류라고 할 수는 없으며, 또한 이것과 엑스타시적 민간샤머니즘이 험프리의 지적대로 차이점에 근거하여 뚜렷하게 구분되기만 하는 것도 아니다. 즉 이 두가지 유형의 샤머니즘은 첫째, 함께 몽골샤머니즘을 이루며, 둘째, 여러 가지 역사적, 지리적 상황의 변화로 인해 차이점을 나타냄과 동시에 ‘유목사회’라는 점 혹은 나눠진 부족임에도 통일국가를 이루기도 했다는 점 등의 요소들과 이 두 유형에는 공통되는 바탕이 깔려있다.

이런 맥락에서 박해와 함께 라마교가 채택한 또하나의 전파방식인 ‘융합’적 경향은 두가지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다. 첫째, 달라이라마의 주도와 몽골칸들의 지지아래 정치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진 박해는 민간의 엑스타시적 샤머니즘, 그리고 그 중에서도 외형적인 것에 국한하여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런데 이미 티벳의 샤먼적 토착종교인 본교와의 통합을 전례로 가지고 있는 라마선교사들은 완전한 개종을 위해서는 외형적 실행의 바탕이 되는 즉 몽골샤머니즘신앙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본질적 신앙체계를 변화시키는 작업, 그리고 박해와 함께 융합 혹은 계승이라는 형태의 보다 온건한 선교가 병행되야 함을 인식하여 처음부터 융합적 경향을 보였다고 말할 수 있다.

둘째, 라마승들이 민간의 샤먼의 기능을 대체하는 기능도 수행하긴 했지만, 보다 주요하게는 전장에서 언급한 정치적 이해관계에 근거 ‘주로 지배층과 결탁 그들을 위한 사제가 되었다’(Humphrey 1995, 140)는 점과 연결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지배층의 몽골인들이 라마교에 보다 호의적이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역시 그들의 샤머니즘적 신앙에 대해서도 선교는 필요했을 것이다. 더군다나, 전 몽골을 라마교화하려는 선교과정에서 지배층의 보다 적극적인 지지를 유도하기 위해서는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그들의 샤머니즘은 엑스타시적이기보다는 험프리가 말한 대로 ‘가부장적’인 것에 가까워 주로 제사나 의례 등을 통해 칸이나 귀족들 자신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었으며, 설사 엑스타시적이었다 해도 지지세력에 대한 박해는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그들의 의례수행에 대해 박해보다는 융합이 보다 적절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또한 마찬가지로 이러한 지배층의 샤머니즘에도 그 바탕이 되는 종교적 사고체계가 있는 바 이를 변화시켜야 한다. 그런데 민간의 샤머니즘과 지배층의 샤머니즘은 완전히 분리된 신앙체계를 가진 것은 아니었다. 실질적 지향에 따라 강조점이 다르지만,  같은 자연과 역사환경을 가진 몽골인으로서 ‘보호’라고 하는 공통된 종교적 지향에 바탕한 신관, 세계관, 그리고 이에 바탕한 공통된 의례적 실천이 존재했다. 따라서, 라마교의 선교는 박해와 동시에 이런 공통된 샤머니즘적 신앙체계에 대해 융합, 혹은 계승이라는 온건한 형태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좁게는 지배층의 샤머니즘, 넓게는 몽골샤머니즘전체현상에 깔려있는 본질적인 사고체계를 대상으로 하는 라마교의 ‘융합적’ 전파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2-1) 신령체계의 변형

   

우선 구체적 변형을 알아보기 전에, 이렇게 몽골신령체계와 만나게 된 라마교신령들의 특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런 특징이 곧 몽골샤머니즘의 신령체계의 변형을 규정짓는 특성이기 때문이다. 라마교의 신령체계는 위계적 성격으로 특징지을 수 있으며, 불교적 도덕관에 기초해 뚜렷하게 ‘선악’의 성격을 갖고 있다. 먼저 지상의 신들 혹은 산, 호수, 다른 지리적 장소의 지역신들이 있고, 이보다 낮은 수준의 사악한 신령이 있다. 이들은 인간에게 전적으로 해를 끼친다. 이 둘은 지상의 신으로 포괄되기도 한다. 그들보다 높은 신은 두가지 종류의 불교신, 즉 불교적 천상(heaven)의 신과 불교명상의 ‘탄트라신’이다. 그러나 전자는 여전히 윤회(samsara)안에 포함되어있는 존재로서 보다 낮은 신이므로, 명상의 신이며 보호신령으로서의 성격을 지닌 탄트라신이 최고신으로 간주된다.(Samuel, 163, 178) 라마승들은 이들 지상의 신들 혹은 지역신들을 고통의 원인으로 간주하며, 따라서 탄트라 의례를 통해 싸워서 제거해야 한다고 본다. 몽골샤머니즘의 라마화를 주도했던 겔룩파는 이런 위계적 신관에 특히 엄격했다. 그래서 ‘진정한 수행자는 지역신에게 의지해서는 안되며, 오직 붓다와 탄트라신들에게만 의탁해야 함’(178)을 강조하면서 지역신들을 탄트라의례에 종속시켜 중요성을 약화시켰고, 이들 지역신들이 현세적 관심사에만 관련되고 불교적 구원인 환생이나 깨달음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에 보호자가 될 수 없다고 보았다.(190) 앞서 언급한 엉거트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이런 겔룩파의 급진적인 경향과 연결시켜 이해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몽골샤머니즘의 신령체계는 첫째, 라마교에 비해 ‘멍케 텡그리’라는 최고신이 있다는 것 외에 위계의 구분이 뚜렷하지 않다. 각 지역과 필요에 따라 다른 성격을 가진 보통 99개라고 인식되는 텡그리들이 지역신으로서 활동하고 있으며, 최고신의 의미가 멍케 텡그리 외의 텡그리들에게도 부여되는 경우가 있는 등 험프리가 지적한 대로 다양한 신들의 차이를 인정하는 수평적 신관으로서의 특징도 함께 가지고 있다. 더군다나, 박원길의 지적에 따르면 이 멍케 텡그리라는 최고신 개념도 12-3세기 중앙집권적 왕권 확립과 함께 형성된 것일 가능성이 있다. 둘째, 라마교적 신앙에서 신령을 통해 원하는 것은 구원이나 해탈이라는 초월적인 것인데 비해, 몽골샤머니즘의 경우는 오직 현세에서의 행복을 위한 신령의 보호이다. 셋째, 신령에 있어 선악의 성질이 라마교만큼 그렇게 뚜렷하게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위계성’, ‘선악개념’, ‘구원의 목표’ 등의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몽골샤머니즘의 신령체계와 라마교의 신령체계가 융합될 수 있었던 것은 탄트라신령이 갖는 ‘보호자’로서의 기능에 기인한다.   티베트의 신들의 기본적인 임무는 바로 악한 영으로부터 인간을 지키는 것이다. 물론, 탄트라신령가운데 사원의 공식적인 탄트라 의례나 요가실행과만 관련되어 그 의례를 수행하는 사람들에게만 직접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는 부분도 분명 중요하지만, 관세음보살, 구루 림포체(Guru Rimpoch'e), 타라(Tãrã)의 신들은 누구든지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신령으로서 대중적 실천을 하고 있다. 즉 탄트라 신령은 단순히 일반신도로부터 멀리 떨어진 것이 아니라, 샤먼적 신령들처럼 구체적인 인간의 삶의 요청에 도움을 주는 신령이기도 한 것이다. 

이제 이를 기초로 구체적인 변형의 내용을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라마승들은 첫째, 몽골샤머니즘의 고유한 신령체계에서  ‘커케 멍케 탱그리 Köke Möngke Tngri(푸르고 영원한 하늘)’, 즉 흔히 ‘멍케 텡그리’를 최고신으로 하는 일종의 천신(天神)들이라고 할 수 있는  약 99개의 ‘텡그리(tngri)’들의 신령체계안에 라마교의 신령을 첨가시킨다. 또한 ‘33개의 텡그리’라는 개념도 있는데, 그곳에서 최고신으로 여겨지는 코르머스타 텡그리(Qormusta Tngri)가 불교의 인드라(Indra)신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설이 있으며, 불교의 세계관에서 33개의 하늘개념이 있다.

그런데 이 99개의 신령체계자체가 라마교에 의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현대의 흑샤만을 조사한 몽골학자인 어트거니 프레브는 흑샤만은 ‘9개의 텡그리’만을 숭배하며, 99개의 텡그리 개념은 황샤만에게서 발견된다고 단언한다.(15) 덧붙여 하이지히도 그 이유는 설명하지 못했지만 99개의 텡그리들이 기도문에서 단지 9개의 대텡그리(Nine Great Tngri)로 나눠지기도 한다는 점을 지적하고는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하이지히는 이들 텡그리들이 분향이나 샤만의 무가, 기도문 등에서 불러지는 일반적인 특성외에도 각각의 특수한 제의를 통해(59) 신앙되고 있음을 강조하면서, 이것이 다른 종교에서 온 것이 아니라 몽골의 전통적인 신령이라고 주장한다. 하이지히의 연구에서는 아직 흑샤만과 황샤만의 구분에 대한 인식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따라서 그가 조사한 몽골의 샤먼이 황샤만이었는지 흑샤만이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실제 그가 틀렸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종래의 학자들이 몽골의 대부분의 샤만에 속하는 황샤만들을 연구대상으로 삼아왔다는 어트거니 프레브의 지적을 고려하면, 99개의 텡그리체계가 티베트불교측에 의해 이루어졌을 가능성도 크다고 볼 수 있다.

둘째, 몽골샤머니즘에는 대지의 신(‘Etügen Eke; 대지의 어머니)'에 대한 뿌리깊은 신앙이 존재한다. 이 신령은 ‘샤마니즘의 토대가 되는 최초의 신앙대상이며’(데 마르하호, 129) 몽골의 전통적 흑샤만들은 태어난 순간부터 대지를 숭배해야 한다고 가르칠 정도로 이 땅을 신성시한다.(126) '에투겐'의 위치는 '멍케 텡그리' 다음이지만, 비옥한 토지와 풀을 자라게 하는 '에투겐의 은총은 멍케 텡그리 못지 않은 것을 몽골인들에게 받아들여진다.(데 마르하호, 122) 구체적으로 이것은 지신(地神)으로서 대지와 물, 산, 높은 곳, 호수, 강 등을 인격화한 정령으로 숭배했으며, 라마교는 이들 지역신령들을 일찍부터 장악했다. 특히 이 중 중요한 것은 ‘대지의 신과 물의 신’인데 이미 16세기부터 이 대지의 신과 물의 신에 대한 분향제의의 기도문에 라마교의 영향이 나타난다. 특히 이 두 신은 라마교의 영향으로 흙이란 의미의 ‘사브다크(Sabdag)’와 물을 의미하는 ‘로스(Luus)'라는 명칭을 갖게 되었다.(데 마르하호, 121) 이 명칭에 대해서는 하이지히도 라마교의 영향임을 밝히고 있다.(105)

한편, 몽골샤머니즘신앙의 실질적인 중심이라고해도 과언이 아닐 조상신령에 대한 라마교의 영향을 살펴보고자 한다.  몽골인들은 지배층이건 평민들이건 ‘조상령’을 숭배하며, 몽골샤먼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런 신앙은 사람의 영혼은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몽골샤머니즘의 영혼관에 근거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샤먼들은 주로 징기스칸과 그의 씨족의 고인(故人), 그리고 고인이 된 유명한 무당 등을 주요한 조상령으로 모셨다.(어트거니 푸레브b, 59) 지배층에서는 주로 제사를 통해 징기스칸이나 역대의 조상과 왕들을 숭배했다. 앞서 언급한 대로 라마교선교사들은 이미 몽골인 대중을 대상으로 중요한 조상령이라고 할 수 있는 '엉거트'를 불태우고 1차접촉과 이차접촉 모두에서 주로 ‘탄트라의례와 함께 티베트에 들어온’(151) 탄트라의 보호신령인 ‘마하칼라’와 부처상으로 대체되었었다. 

나아가 조상령에 대한 변형은 가장 중요한 조상신으로, 몽골의 샤먼들이 매우 존숭하며 이에 못지 않게 지배층의 제사에 있어 중시되는 신성인 ‘징기스칸’이 갖는 독특한 지위를 격하시킴으로서 이루어졌다. 우선 징기스칸은 조상신이었음에도 천신, 특히 최고신과 같이 창조신의 성격을 띄었고, 어떤 특별한 기능도 요구받지 않았다. (Heissig, 62) 그런데 라마교는 이 징기스칸을 라마교의 신인 상가팔라(Sanghapala)와 동일하게 간주됨과 동시에 지상으로 내려올 것과 주술적 능력을 줄 것 등의 특별한 기능을 부여해서 그런 절대적 권위를 부정하고 단순한 라마교의 보호자로 전락시킨다. 동시에 징기스칸의 권위를 라마교의 전파에 이용하려고 본래 역사적 조상이었던 징기스칸에게 ‘정치적 창조신’으로 ‘신비적’ 특성을 부여하여 중요한 관습들의 창시자로 간주되게 만든다. 그리고 이러한 성격의 징기스칸을 불교옹호자로 간주되어온 티베트왕 롱첸감뽀(Srong btsan sgam po, 620-649) 등, 고대의 왕들과 함께 언급함으로서 국가의 종교정책을 이끄는 몽골황실에서 징기스칸이 갖는 것과 같은 영향력을 이들 왕에게 부여하여 몽골의 지배층들이 라마교의 전파를 지지하게 하려는 의도였다.

한편 다른 여타신령들에 대해서도 변형을 가한다. 첫째, 신령의 성격을 변형시킨다. 몽골인의 가장 오래된 종교신앙인 불의 신령(火神)은 ‘Fire-Mother'로서 ‘여성성’으로 표현되었는데, 라마교영향이후에는 ‘Fire Tngri'나 ‘Fire King'과 동일시되어(Heissig, 72-3) 남성성을 띄게 되었고 또한 라마교의 신와 비슷하게 묘사되었다.’(72) 신의 성격도 보다 온화하게 바뀌어 예전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라마교의 영향으로 모습과 성격이 변형되었음에도 유목민인 몽골인들의 삶에서 갖는 기능은 변함없이 유지되었다. 하이지히는 사실 라마신의 이름이나 라마적 어구 혹은 전설 등이 불의 제의에서 나타나는 것은 몽골인들이 그들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위장한 것이라고 보고 있다.(76) 또한 샤먼적인 개념으로 모든 사람이 가진 보호령임과 동시에 징기스칸의 군기안에 있던 인격화된 보호신령으로 샤먼의 엉거트처럼 그들을 부른 후손들을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고 믿어졌던 ‘슐드(Sülde)’에 대해, 라마교는 불의 신에 대해 그런 것처럼 성격을 바꾸어 이것이 악한 세력과 위험을 근절하는 무장한 신으로서의 기능을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러나 라마교가 이런 변화를 가져왔음에도 이것의 보호기능은 점점 더 분명해졌다.  

둘째, 몽골신령의 기원이나 권한을 붓다나 여타의 라마신령이 부여한 것으로 변형시킨다. 예를 들어 본래는 자연물이나, 징기스칸이나 쿠빌라이 혹은 그들의 가족 등 몽골의 역대통치자들이 불의 창조자로 간주되었었는데, 라마교는 불의 신령이 탄트라적 명상의 결과로 생겼으며, 붓다와 파드마삼바바(Padmasambhava)같은 탄트라주술가들이 불의 창조자라고 보았다.(72) 또한 가축과 풍요의 신, 대지와 물의 지배자로 숭배된 일종의 창조원리의 인격화라고 할 수 있는 '챠간 에부겐 Tsaghan Ebügen(하얀 노인)의 기능을 붓다가 확립시켰다고 보았으며, 기능을 바꿔 불법을 어기는 것에 대해 처벌하는 기능을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가 갖는 고대의 기능과 샤먼적 개념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마지막으로 비슷한 성격의 라마신령과 몽골신령을 동일시 혼동되게 함으로서 자연스럽게 몽골의 신령과 라마신령을 혼합시키는 방법을 취함으로서, 몽골의 신령체계를 변형시켰다. 무장을 하고 말에 탄 영웅의 모습을 한 보호신령들인 ‘슐드 탱그리(Sülde Tngri)’, 혹은 ‘다이친 탱그리(Dayičin Tngri)’를 티베트만신전에서 이와 비슷한 모습을 한 ‘dGra lha’신의 번역인 ‘Dayisud Tngri’와 혼동되게 사용하고, 티베트의 신령인 ‘Geser Khan’을 몽골신령체계에 포함시켜 대중화하여 이들 개념을 모두 비슷하게 쓰이게 한 것이 대표적 예이다. 

이와 같은 방식에서 이루어진 신령체계의 융합은 첫째, 붓다나 그 밖의 탄트라 신령이 몽골샤머니즘의 주요한 신령의 기능을 확립시키거나 신령들을 창조했다고 규정하고 징기스칸과 같은 특별한 지위의 신령을 일반 신령의 지위로 전락시켜 그 몽골의 샤먼적 신령의 중요성을 약화시킨 것에서 알 수 있듯이, 탄트라신령은 보다 지배적이고 중요하게 만들고 몽골의 신령은 본래의 중요성을 잃게 만드는 위계적 방식이어서, 라마교의 영향 이후 몽골샤머니즘의 신령체계는 이전보다 보다 더 위계적인 성격을 띄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둘째, 챠간 에부겐과 슐드의 경우에서 두드러지듯이 선악의 성격이 이전보다 뚜렷하게 몽골신령체계에 가해진 것같다. 이것은 라마교전파가 낳은 몽골샤머니즘 전체의 도덕적 변화와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 험프리도 이러한 변화를 강조하고 있다.(Humphrey 1995, 40)  셋째, 특히 가장 일상적인 샤머니즘실행의 대상인 조상령에 대한 변형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융합의 방식에 있어 라마승들은 몽골샤머니즘의 신령체계전반을 대상으로, 일단 체계의 완전한 부정이 아닌 어느정도의 긍정에서 출발하였고, 나아가 완전히 새로운 신령을 추가하거나 완전히 새로운 기능을 첨가하기보다 기존의 신령과 비슷한 신령을 도입하거나  기존의 기능에 근거 그것에 라마신령의 특성을 가미하는 방식을 취했다는 점을 지적해 볼 수 있다. 즉 그 틀을 유지시키면서 실질적 내용에 있어 라마화를 전개시켰다고 정리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이런 온건한 방식의 융합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은, 앞서 지적한 대로 라마교의 신령체계와 몽골샤머니즘의 신령체계가 갖는 어느정도의 공통점에 기인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2-2) 세계관의 변화


라마교의 세계관을 보면, 인도불교의 영향을 받은 라마교의 우주는 중심이 되는 산(Mount Meru), 네 개의 대륙(continents)과 여덟 개의 하위대륙(subcontinents)을 구성요소로 하고있다. 이 때 네 개의 대륙은 이 산을 둘러싸고 있으며, 곧 이 산은 우주의 축이 된다. 그 산의 정상으로부터 위로 올라가면 더 높은 신들이 있는 하늘(heavens)이 뻗어있다. 그런데 이 천상의 신들안에도 위계가 있어 욕계(desire-realm)의 신들을 거쳐, 형상세계(form-realm)의 신들, 나아가 무형상(formless)세계의 신들로 올라갈수록 보다 순수하게 된다.  한편 이 지상의 세계아래에는 지하계(hades)가 있으며, 이 세계내에서도 처벌의 강도와 머무는 기간에 따라 여러 등급을 가지고 있다.(Samuel, 157-8)

반면, 몽골의 샤머니즘은 기본적으로 지금의 생(this life) 혹은 현세(this world)를 떠난 내세에 대한 관념은 없다. 흑샤먼을 연구한 어트거니 프래빈도 ‘혼이 한 사람에게도 다른 사람에게로 옮겨가는 것이며 새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면서’(16) 이 의견을 지지한다. 그래서, 이 세계외의 다른 세계(other world)는 중시되지 않는다. 죽은 조상령 역시 이 세계안에서 매장된 곳에 남아 있다.(Heissig, 16) 샤먼의 주요한 기능도 현실적 혹은 세속적인 것으로 라마교영향이전의 샤머니즘 형태를 잘 보여주는 부리야트몽골의 기록에 따르면, ‘지금 살아있는 존재를 돕는 것’이다.(11) 즉 고대형태의 몽골샤머니즘에서의 구원은 곧 현세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앞서 살펴본 대로 이 세속의 현세 외에 더 아래 등급의 지하계(Hades)와 보다 높은 천상의 세계가 존재한다.

이것은 현재가 과거의 업의 결과이고, 또한 현재의 업이 미래를 결정한다는 불교적 사고에 바탕해, 미래의 행복을 상정한 라마교의 구원관과 연결된다. 이러한 라마교의 구원관이 과연 몽골샤머니즘안에 얼마나 수용될 수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이런 세계관의 영향으로 지하계(Hades)와 같은 개념을 갖게 되었다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16) 예를 들어 앞서 언급한 ‘하얀 노인’의 신령의 기능은 라마교에 의한 샤머니즘적 세계관의 변화를 잘 보여준다. ‘몽골인들에게 지옥의 공포를 생생하게 묘사한 책이 오랫동안 배포되어 불교의 지옥개념이 뿌리깊게 영향을 주었는데, 바로 이 신이 사람들의 죄를 기록한다고 생각되게 되었다.’(Heissig, 79)  이것은 샤먼적 개념에서의 이 신이 본래 갖던 악을 행한 자에 대한 처벌의 역할을 라마교가 이용하여 라마교의 세계관을 심어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2-3) 의례의 변화의 성격 - 오보제


이것은 지역마다 차이가 있어, 어떤 곳은 그 영향의 정도가 거의 없는 경우도 있고, 단순한 혼합에 머문 경우도 있었으며, 또한 라마교의 세력이 강한 지역에서는 그만큼 더욱 라마교적 특성을 띄고 있었다. 여기서는 몽골샤머니즘의 제사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의미를 띄며, 현재까지도 지속되고 있는 ‘오보제’를 중심으로 이 영향을 분석해보고자 한다.  

오보제는 앞서 언급한 대지의 신과 물의 신을 총체적으로 말하는 ‘지신地神’에 대한 샤먼들의 뿌리깊은 신앙만큼이나 몽골인들 사이에서 널리 보편적으로 행해졌던 일상적 의례였다. 뿐만 아니라 오보제는 라마교가 가장 적극적으로 이용하고 참여한 몽골인의 종교로서, 또한 가장 라마화로의 변형이 잘 나타나는 제의라는 면에서도 중요성을 갖는다.

그런데 이러한 원인에 대한 학자들의 분석은 조금 차이가 있다. 대표적으로 몽골인학자 데 마르하호는 이것의 원인을 오보제가 워낙 몽골인들에게 뿌리깊은 것이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123) 그래서 엉거트에 대해서처럼 박해를 가하는 대신 융합을 택하여 라마교 선교에 이용했던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반면, 험프리는 오보제를 거의 산숭배로서 강조하고 그것이 함축하는 수직적 세계관과 남성중심의 가부장적 구조가 라마교가 오보제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된 원인이라고 본다.

그러나 오보제의 관습을 분석한 박원길의 논문에서도 밝혀지듯이, 오보는 단순히 산만이 아니라 평지에도 세워졌다. 그리고 씨족장이나 통치자에 의해서 뿐 아니라 일반가정에서도 실행되었다. 또한 오보제는 엑스타시적 샤머니즘을 함축하고 있었다. 즉 샤만의 참여하에 실행되는 경우도 많았으며, 오보를 설치할 장소를 정하는 것은 로스-사브다크가 자신이 머무는 장소를 샤먼에게 알려줌으로서 가능하다.(데 마르하호, 122) 나아가 무엇보다 험프리의 의견에 반론이 될 수 있는 사실은 이런 오보제를 가능케 한 신앙이 바로 여성으로 상징되는 대지의 신에 대한 신앙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그 직접적 원인에 대해서는 몽골인 학자인 데 마르하호의 분석이 보다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라마교는 엑스타시적 샤먼의례와 관습을 무조건 탄압한 반면, 지배층과 민간을 망라하여 몽골인 모두의 삶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오보제에 대해서는 계승을 통한 변형을 시도했다. 그래서 직접 제사의 주도권을 계승하였고(박원길, 130) 또한 이를 표준화하고, 유혈제의를 금지하는 등 불교적 방식으로 변화시키는 데 적극적이었다. 라마사원근처에 오보들이 세워졌고(144) 라마교가 우세했던 지역에서는 라마가, 주로 마을의 장로나 칸들에 의해 시행되던 오보제를 시행했다. 그 결과, ‘라마교의 전입 이후, 몽골의 오보신앙은 라마교와 결합, 라마교번성과 더불어 더욱더 확산되었다.’(171)

한편, 메르겐 다얀치 바자르다르(Mergen Diyanchi Vajiradhara)가 쓴 <오보제의 의식과 독경문>이란 글을 통해 라마교측이 시도한 융합의 성격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다. 그 글은 동물을 희생으로 바치는 것이 사람들의 식욕을 채우려고 한 것이라며 비난하고 있긴 하지만, 결국 이것이 인간생활에 필요함을 인정하여 오보제를 시행하는 몽골인들의 절박한 상황과 종교적 필요에 대한 수용의 입장을 보이고 있다.(123) 그러나 그것의 해석과 실제적인 실행에 있어서는 몽골고유의 오보제와 차이가 있다. 흑색샤머니즘에서는 중앙의 큰 오보를 중심으로 12개의 작은 오보를 세우는 데, 이것은 ‘민족의 화목을 상징하는 것으로, 주요한 역할을 띤 한 부족을 12개의 작은 부족이 친목과 화해로 뭉쳐 몽골민족을 형성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127) 그러나 라마승들은 불교의 세계관에 따라 해석, ‘13개의 오보는 세상전체를 의미하고, 큰 오보는 불교의 우주론에서 천신(天神)과 그 휘하의 33개 하늘이 있다고 여겨지는 숨베르산이며 나머지는 12개의 작은 대륙(tiib) 즉 속세라는 것이다’.(123) 그래서 이런 불교적 관점에서 오보를 이해할 경우는 오보제도 라마교의 의식에 따라, 제사를 위해 모셔온 승려가 염불을 외우며, 가축대신 곡물이나 유제품이 바쳐진다. 또한 제사를 드리는 신에도 불교의 중요한 신들이 포함된다. 또한 오보제를 통해 실질적인 행복과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인과응보’를 통해 설명한다.(124-5) 그 현실적 필요에는 공감하지만, 근본적인 세계관의 차이로 인해 그 제의에 대한 해석은 달라지고 있는 것이다. 덧붙여, 몽골인들이 신성시하던 ‘멍항산’과 ‘황하’강의 산신령이 불교를 지지한다고 기록하기도 했다. (125) 이 글을 분석해보면, 오보제가 본래 수직적 세계관을 함축한 것이 아니며, 라마승들이 오보제를 그들의 가치관에 맞게 해석 적용한 것이라는 점이 드러난다. 즉 험프리의 해석이 완전하게 적용될 수는 없음이 증명된다. 몽골인모두의 일상적인 제사의식을 라마교전파의 중심으로 채택, 그들은 신령체계의 예에서 보여지는 바와 같이 틀을 유지하되 그것의 내용은 그들의 세계관과 가치체계에 맞게 변형시켰던 것이다.

(작성자: 이 영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