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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고대사와 근현대사 개관

몽골승마클럽 2006. 12. 22. 19:19
  • 몽골 고대사


몽골족에 대한 최초의 언급은 중국 당조에 기록된 문서에 처음으로 나타난다. 그 후, 전혀 언급이 없다가 11세기에 거란족이 중국 북부를 통치할 때 다시 언급되기 시작했다. 거란족은 북방 민족들에 의해 키타이 (Qitay)라고 불리워 졌는데, 유럽에 Cathay라는 말로 전해졌다. 거란족은 요(遼)나라를 세워 중국 북부를 907-1125년 사이에 통치했는데 몽골계 부족으로 알려져 있다. 거란은 1125년 퉁구스계 부족인 여진족에 의해 멸망당했는데, 여진족이 세운 국가가 금(金)나라이다. 그후 몽골의 한 부족인 타타르(Tartar)족이 방에서 활약했는데 북부 몽골리아의 오논(Onon), 케룰렌(Kerulen) 계곡과 주변에서 살았다.요나라가 멸망한 후 거란족들은 거란 지도층의 인도하에 서쪽으로 이동하여 지금의 카작키스탄 지역에 도달했다. 그들은 후에 이곳에서 카라키타이(Qara Qitay)라는 강력한 국가를 세웠다.1206년 칭기스칸의 영도아래 몽골제국을 수립하였던 몽골민족은 현재의 중국, 한국, 중앙아시아 및 중앙유럽, 아라비아 반도를 포함하는 광대한 지역을 통치하였다. 14세기 중엽 내부적 분쟁의 결과로 몽골제국이 해체된 후, 청나라의 교묘한 몽골분열정책이 성공하여 몽골의 재통일은 이루어지지 못한 채 세월은 흘러갔다. 1691년 돌로눌(Dolonor)조약에 의해 몽골은 정치적인 독립의 기회를 완전히 상실하고 공식적으로 중국의 변방성(省)이 되었다. 그 후 2세기동안 몽골은 종족의 분산 과정을 겪으면서 남부 지역 내몽골은 외국 열강의 식민지화가 이루어지고, 북부 지역 외몽골에는 신정권력이 강화되었다.1911년 중국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몽골의 지배자들은 이것을 몽골이 청나라의 지배로 부 터 벗어날 수 있는 호기로 생각하여, 그해 12월 울란바토르(당시명 우르가)에서 혁명을 일으켜 몽골의 독립을 선언하였다. 이러한 독립운동은 제정 러시아의 지원을 받아 이루어 졌으나, 당시 주로 유럽 전선에 힘을 쏟아야 했던 러시아는 몽골 문제로 청조와 분쟁을 일으키기를 원치않았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지원하지 않아 결과없는 운동에 그치고 말았다. 그 후 1915년 중국을 종주국으로만 인정하는 자치권을 부여받았으나, 얼마 못가서 1919년에 다시 중국에 통합되었다.1921년 몽골인민혁명당이 창설되었으며, 이들은 국민들을 민족해방운동에 동원하고, 소련 적군(亦軍)의 원조를 받아 당시 백군(白軍)에 의해 점거되어 있던 우르가를 점령 하는데 성공했다. 이로써 몽골 혁명정부는 소련의 원조아래 독립의 제 일보를 내딛게 되었다. 그 후 몽골은 1924년에는 몽골인민공화국이라는 국명아래 공식적인 새로운 국가를 수립하였다. 이 혁명후에 몽골은 그들의 장래를 사실상 소련과 같이하게 되었던 것이다.1930년대 중반부터 1984년까지 몽골의 정치는 크게 두 시기로 구분되어 진다. 1930년대 중반부터 1952년까지 제 1기는 쵸이발산이 집권한 시기로서 정치적, 종교적인 대숙청을 통해 몽골인민혁명당(MPR)의 집권을 강화하는 시기이다. 이 시기에 몽골은  쵸이발산의 통치하에 중앙집권적 국가로서의 기틀을 다지게 되었는데, 이로써 과거 전통적인 라마불교의 종교 세력은 대대적으로 붕괴되었다.제 2기는 체덴발의 통치기간이다. 1952년 당의 지도자가 된 체덴발은 중앙집권적 국가 통제경제 골격을 확립하였으며, 1974년에는 국가 원수가 되었다. 1961년 UN에 가입하였으며, 1965년 부분의 공산권 국가들과 정식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그후 영국, 프랑스, 카나다 등 비공산 서방 국가들과도 외교관계를 맺어 총 40여개의 국가들과 국교 관계를 맺게 되었다. 1969년 중. 소관계가 악화되면서 소연방군이 몽골내로  진주하였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1970년대 이후에 소련과의 관계는 한층 더 강화되었다.1984년 8월 체덴발이 권좌에서 물러나고 같은 해 12월 바트문흐가 이끄는 온건 정부가 들어서게 되었다. 바트문흐는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에 보조를 맞추어 위로부터의 개혁인 시네치엘(쇄신)을 실시하게 되었는데, 이 개혁이 국민 들의 기대 이상의 것이 되지 못하고 부진하여 국민들의 반발을 불러 일으키게 되었다. 급기야 1989년 12월 몽골민주연맹의 주도하에 아시아 공산국가에서는 최초로 민주화 가두시위가 발생하게 되었다. 몽골민주연맹은 학생, 종교인, 예술인, 지식인 등으로 구성된 재야세력으로서, 지금까지 몽골의 민주화 운동을 주도하는 핵심 세력으로 활약했다. 1990년 1월 14일 이들은 울란바토르에서 체덴발의 재판 회부 요구와 그들을 지배했던 공산 이데올로기의 전면 부정, 스탈린식 정치 제도와 집권 인민혁명당의 독재체제를 비난하는 시위를 시작하여, 4일 후에는 스탈린 동상을 철거하였다.1월 20일에 정부는 개혁단체인 몽골민주연맹(DMU)을 인정, 공산당 일당 독재포기를 시사하였고, 지방 당직의 경선제 도입, 연내 개헌 착수, 자유총선 실시 등 잇따른 정책 변화를 발표함으로써 몽골 민주화 시위에 대한 굴복의 뜻을 나타냈다. 같은 해 2월 18일 몽골민주연맹을 주축으로 한 몽골 최초의 야당인 몽골민주당(MDP)이 창설되었고, 3월 12일 몽골 정치국원 전원 사퇴에 따라 공산당 권력 독점이 막을 내렸으며, 3월 15일 바트문흐 서기장의 사임으로 몽골의 민주화 시위는 승리로 끝나게 되었다. 1992년 1월 몽골인민대회(Great Huural)에서 사회주의를 완전히 청산하고 중립, 비동맹, 자유시장 경제를 지향할 것을 선언하였고, 몽골인민공화국(Mongolian People's Republic)을 국명 몽골국(The State of Mongolia)으로 개명하였다.

몽골제국은 유라시아대륙에 걸쳐 몽골족이 건설한 세계 역사상 최대의 제국이었다. 몽골제국의 영토는 동아시아의 황해에서 동유럽 변경까지 이르렀다. 몽골제국은 한때 중국, 몽골, 페르시아, 투르키스탄, 아르메니아와 미얀마, 베트남, 타이, 러시아의 일부, 고려까지 포함했다. 몽골제국은 광대한 영토를 차지해서 동서 접촉과 교류를 증진시켜 동서간의 교통로가 개발되고, 중국의 인쇄술, 종이, 화학, 컴퍼스 같은 발명품이 서유럽으로 전해졌다.

12세기 중엽 몽골고원의 오논,케룰렌 두 강 사이를 중심으로 각지에서 유목생활을 하며 할거(割據)하고 있던 몽골계,투르크계의 씨족 및 부족 중의 한 몽골 씨족 출신의 테무친[鐵木眞]은 1189년경 자기 부족과 이어 몽골 여러 씨족을 통일하고 그 맹주(盟主)로 추대되어 1206년 칭기즈칸이라는 칭호를 받고 즉위하였다. 그 후 그는 주변의 타타르,메르키트,케레이트 등 부족들을 정복하여 복속시키고, 또한 서방의 알타이 방면에 근거지를 두고 대항하던 투르크계의 나이만 부족을 멸망시켜 세력을 확대하여, 몽골고원을 통일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 후 칭기즈칸은 몽골을 지배하는 대칸[大汗]의 지위에 오르자, 그때까지의 씨족 및 부족제도에 바탕을 두었던 국가 기구를 개혁하여, 국내 유목민을 95개의 천호(千戶)로 하는 집단제로 분할하였다. 그가 구성한 천호 및 그것을 구성하는 백호(百戶) 집단은 행정단위이면서 군사단위였는데, 천호란 약 1,000명, 백호는 약 100명의 병사를 제공하도록 정해놓은 것이다. 천호장(千戶長)과 백호장(百戶長)에는 공신(功臣)을 임명하고, 그것을 좌익(興安嶺 방면),중군(中軍),우익(알타이 방면)의 총지휘관 만호장(萬戶長)의 지휘하에 두었다. 만호장,천호장,백호장의 자제는 케시크티라 불린 대칸의 친위대를 구성하고, 칭기즈칸 일족에게 충성을 맹세함과 동시에 각종 특권이 부여되었다.

칭기즈칸은 국가의 재정적 기초를 견고하게 하기 위해 금(金)나라,서하(西夏) 등 남쪽방면의 농경지역에 침입하여 말,낙타,재물 등을 약탈하고, 그곳의 직업적 기술자나 농민들을 잡아 유목지대로 강제 이주시켜 촌락을 이루었다. 또 유라시아 대륙을 통하는 동서무역로를 확보하기 위해 서방으로 대군을 진격시켰다. 먼저 그는 나이만 부족 족장의 왕자 쿠츨루크가 서요(西遼)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왕이 되었으므로 이를 토벌하여 이 지역을 병합하였다. 이어 서(西)아시아 이슬람 세계의 보호자로 자임(自任)한 호라즘 샤왕조에 통상사절단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사절단 일행이 학살된 것을 계기로 삼아 서방세계에 대한 대원정(大遠征:1219~25)을 감행하였다. 그 결과 호라즘 국왕은 전사하고, 그의 왕자도 패하여 인도지방으로 도망쳤다. 몽골군은 진격을 계속하여 러시아 제공(諸公)의 연합군을 격파하고, 크림반도를 침공하여 약탈을 자행한 후 귀국하였다. 칭기즈칸은 다시 서하를 토벌하다가 27년 진중에서 병사하였다. 칭기즈칸은 서방 원정에서 승전하고 개선한 후, 영토 중 유목지역은 그의 여러 아들과 동생들에게 각각 분할 통치하게 하였다.   즉, 몽골 본토는 칭기즈칸 자신의 직할지로 하여, 넷째아들 툴루이에게 계승하기로 결정하였고, 맏아들 주치(Juchi, 朮赤)에게는 카스피해(海)와 아랄해 북방의 영토, 즉 남(南)러시아의 킵차크 초원지대를 분할하여 주었으며(후의 킵차크한국), 둘째아들 차가타이에게는 아무강(江) 평지이며 서요(西遼)의 옛 땅인 중앙아시아를 나누어 주었다(후의 차가타이한국).또 셋째아들 오고타이(후의 제2대 황제 太宗)에게는 일리강 유역을 중심으로 외몽골 서부에서 톈산산맥[天山山脈]에 걸친 나이만 부족의 옛 땅인 몽골고원 일대를 나누어주었다(후의 오고타이한국). 그리고 동부 몽골고원과 중국의 북동지구(만주지방) 방면은 동생들에게 나누어주어 통치하게 하였으며, 남방의 농경지대는 그것을 그들 일족의 공유재산(共有財産)으로 하고, 거기에 다루가치[達魯花赤:총독]와 주둔군을 배치하여 치안유지와 징세(徵稅) 임무를 맡게 하였다.

칸(汗)은 원래 유력한 부족장들의 회의인 쿠릴타이에서 선출되었으나, 칭기즈칸의 즉위 후 이 관례는 형식적인 것이 되었고, 그가 죽자 쿠릴타이는 칭기즈칸이 죽기 전에 이미 지명한 오고타이를 대칸에 즉위하도록 결정하였다. 오고타이는 금(金)나라와 대규모 전쟁을 재개하여 이를 멸망시키고, 1234년에는 화이허강[淮河] 이북의 중국을 점령하였다. 한편 서방에 대해서는 주치의 둘째아들 바투에게 명하여 러시아 및 유럽 각지를 1235~42년에 토벌하게 하였다. 그 결과 남(南)러시아는 몽골제국 지배하의 킵차크한국이 되었다. 태종(太宗) 오고타이칸은 오르혼강 상류지역에 수도 카라코룸성(城)을 구축하고, 이곳을 기점으로 하여 전영토로 통하는 도로를 건설하고 그 연도(沿道)에 역전(驛傳)제도를 정비하였다. 이 제도로 광대한 영토 내의 교통이 용이하게 소통되고 편리하게 되었기 때문에 동서문물의 교류가 활발하게 촉진되었다. 또 오고타이칸은 옐뤼 취치이 등 정복지역의 학자나 문화인 등을 등용하여 행정기구를 정비하고, 또한 최초의 정액세법(定額稅法)을 시행하였다.

오고타이칸의 사후 그의 황후가 섭정을 한 다음, 오고타이의 큰아들 구유크가 제3대의 대칸위에 오른 뒤 3년 만에 죽자 다시 황후가 섭정이 되었다. 이처럼 대칸위의 공백시대가 계속되었던 것은, 오고타이 일가와 바투를 지지하는 툴루이 일가와의 대립이 치열하였기 때문이었다. 오고타이 일가에서는 다음 대의 대칸위에 오고타이의 손자인 쿠주크 시레문을 추대하였고, 이에 대항하여 바투는 툴루이의 큰아들 몽케를 추대하여 싸움이 계속되었는데, 결국 툴루이측이 승리를 거두어 몽케가 제4대의 대칸위에 올랐다. 그 후 툴루이의 자손이 몽골제국 → 원조(元朝:1271~1368)의 대칸위를 독점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일족 내부에서의 대립과 항쟁은 몽골제국을 분열시키는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 몽케칸은 오고타이칸의 사후 약 10년간 난맥상태를 이룬 통치기구를 쇄신하여 관제를 개혁하였으며, 중국의 화북(華北) 지방과 투르키스탄의 요지를 확보하고, 호구조사를 실시하여 세제(稅制)를 개정하였다. 그는 국내의 재통일에 성공하자, 동생 쿠빌라이에게 중국의 쓰촨[泗川],윈난[雲南] 및 안난[安南],티베트[西藏] 등의 토벌을 위해 대군을 출동하게 했고, 셋째동생 훌라구를 이슬람국가 정복을 위해 파견하였다. 훌라구는 1253년 서방정벌에 나서, 이란에 침입하여 바그다드를 공략하고, 58년 아바스왕조를 멸망시켜 이곳 이란 지역에 일한국(1258~1393)을 건국하였다. 한편 1231년 이래 3차례의 공략에도 굴복하지 않은 고려를 정벌하기 위해, 53년 대군을 파견하여 고려로부터 항복을 받았다. 몽케칸도 남송(南宋) 토벌작전에 참가하였으나 쓰촨성[四川省]에서 병사하였다. 제4대의 몽케칸이 죽자, 수도 카라코룸에서 몽케칸의 부재 중 대리로 일을 맡고 있던 막내동생인 아리크부카는, 그의 부하와 오고타이계 제왕의 지지를 얻어 대칸위에 오르려고 시도하였다.

쿠빌라이는 남송과 일시적인 화평조치를 취하고 급히 귀환하여, 그의 신복들로 구성된 쿠릴타이의 추대를 받아 제5대 대칸위에 올랐다. 그후 아리크부카의 반란을 진압하고 71년 국호를 원(元)으로 개칭하였다. 한편, 쿠빌라이에게 불만을 품은 일파는 오고타이의 손자인 하이두를 칸으로 추대하여 쿠빌라이칸과 대립함으로써 이때부터 30년에 걸친 국내전이 시작되었다. 내전을 계기로 킵차크한국과 차가타이한국은 하이두의 편에 서고, 일한국은 쿠빌라이측에 가담함으로써 칭기즈칸이 이루어놓은 몽골제국은 분열하였다. 결국 쿠빌라이칸이 승리하였지만(1303), 이때에는 이미 쿠빌라이나 하이두가 모두 죽은 뒤였다. 이 싸움은 유목,농경 양 지역을 영유함으로써 크게 개화(開化)한 원조(元朝) 및 일한국과, 유목지대를 본거지로 삼고 종래의 유목적 전통생활을 보존하려 한 여러 한국과의 싸움이었다. 그러나 그 후 원조와 대립하였던 여러 한국도 점차 개화됨으로써 원조와 화의를 맺게 되어, 몽골제국의 상호 연대성이 부활되었다. 원조는 몽골제국의 정통을 계승한 종주국(宗主國)이 되었고, 1310년 멸망한 오고타이한국을 제외한 다른 킵차크,차가타이,일 등 3한국이 서로 연합함으로써 그로부터 거의 60년간 유라시아대륙은 󰡐타타르의 평화󰡑를 누리게 되었다. 또 아시아와 유럽 세계 사이의 문화교류도 활발해졌다. 그러나 몽골제국은 몽케칸의 치세(治世)까지 몽골고원의 대칸의 권력과 혈연적 연관에 의해 보존하고 있던 통일성을 잃고, 다만 원나라를 종주국으로 하여 그 정권 밖에서 독립국을 형성한 3한국으로 구성된 연합왕국이었다. 이 연합왕국도 원나라의 멸망(1368)과 함께 붕괴하였다.




  • 몽골 역사

테무진이 태어남 

1164 칭키스칸의 동생 Khavt Khasar 태어남

1170 Kahmag Mongol의 지도자인 칭키스칸의 아버지 Esukhei가 Tartars에 의해 독살됨

1184 칭키스칸의 첫째 아들 주시 태어남

1185 칭키스칸의 둘째 아들 차가다이 태어남

1186 칭키스칸의 셋째 아들 오고타이가 태어남(차후 칭키스칸의 대를 이어 왕이 됨)

1189~1205 여러 아이막을 통합함

1206 칭키스칸에 의해 몽골의 모든 아이막과 부족들이 통합됨. 테무진을 대 몽골제국의 지도자로서 칭키스칸이라 부름

1220 몽골제국의 수도 하라호름을 짓기 시작함

1221 호리즘 정복하여 인디아까지 도달

1223 러시아 정복, 불가리아 까지 도달

1224 중동지역 정복

1225 칭키스칸이 중동을 정복하고 돌아오는 길에 승리를 축하하는 거대한 돌비석 (후에 칭키스칸의 돌 이라고 함)을 남겨둠.

1227 8.25일 칭키스칸 죽음. 

1229 칭키스칸의 셋째 아들인 오고타이가 왕위계승함. 최초로 관세법을 개시함.

1231 몽골군대 아라비아 정복, 오고타이 고려침략

1232 고려왕 항복, 형제관계 

1235 하라호름이 몽골제국의 수도가 됨

1236 칭키스칸의 손자인 바트칸이 러시아 정복, 불가리아 정복

1239 고려사절 몽골제국에 옴

1241 오고타이한 죽음, 몽골군대 독일과 폴란드를 무찌르고, 헝가리, 체코, 오스트리아군과 싸움

1244 몽골과 고려의 관계 개선됨

1206~1634  몽골제국

1585 최초의 불교사원 에르덴주 건축(하라호름)

1631 중국 청왕조 몽골남부지방(지금의 내몽고)으로 세력확장

1911 중국 청왕조의 멸망으로 몽골 12.1일 중국으로부터 독립

1911~21  몽골통치를 놓고 중국과 러시아의 각축속에 몽골 인민당에 의해 주도되고 소련에 의해 지원을 받은 새로운 정부가 1921년 권력을 잡음

1912 호브트시로부터 만주군을 내쫓음. 

1919 중국의 군대가 몽골을 침입, 몽골 민족주의자들이 독립을 위해 2개의 비밀조작을 만듬

1920 2개의 비밀조직이 통합되어 몽골인민당 성립. 이조직의 지도자가 보그드한의 편지를 갖고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러시아로 건너가 볼쉐비키 지도자 레닌을 만남. 백러시아 군대가 중국을 몽골에서 추방함

1921 차그아르자브를 수상으로 하는 임시정부, 몽골군대 니스렐 후렐 (울란바타르 시의 전신) 찾음. 몽골의 인민정부가 실권이 없는 보그드한을 8번째 지도자로 추대함. 몽골과 러시아 사이에 외교관계 성립

1921~24  보그드 칸의 군주시대

1923 몽골 민족지도자 담딩 수흐바타르(1893~1923) 병으로 죽음

1924 최초의 신문 `인민의 권리` 출간. 11.26 새헌법이 통과되고 몽골인민공화국이 공표되며 세계에서 2번째로 공산국가가 됨. 몽골 인민당이 몽골 인민 혁명당 으로 개칭됨. 수도 니스렐 후렐이 울란바타르(붉은 영웅)로 이름이 바뀜.

1925 몽골화폐 투그릭이 소개됨

1934 나차그도르찌가 쓴 초페라󰡒The Three Fateful Hills"가 공연됨

1939 일본군 몽골국경 침입하여 할흐강 전쟁 시작. 몽골과 러시아가 동맹하여 일본군을 공격하여 패퇘시킴

1940 3.20 새 헌법 통과

1942 몽골 국립대학교 문을 염

1946 중국 몽골의 독립을 인정

1948 몽골 북한과 외교관계 수립 

1949 몽골과 중국, 몽골과 알바니아 사이에 외교관계가 수립되고 몽골 중국간 철도가 개통

1950 동독, 폴란드, 불가리아,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루마니아와 외교관계 수립 

1952 대 지도자 초이발산(1895~1952, 1939~52 수상역임) 사망 

1954 베트남과 외교관계 

1955 모스코바<->울란바타르<->뻬이징을 잇는 대륙열차가 개통. 인디아와 외교관계 수립

1956 버마, 유고슬라비아, 인도네시아와 외교관계 수립

1958 날라이흐 석탄광 오픈

1964 스웨덴, 스위스와 외교관계 수립

1974 에르데네트시 공사시작(구리)

1988 역사 영화 만두하이 공연

1990 2.16 울란바타르 시의 거리 및 광장에서 집회 금지

1990 2.18 몽골 민주협회 조직, 최초의 무료신문 신톨리(새거울) 출간

1990 2. 2 몽골 민주당 선포, 4미터의 스탈린 동상 무너뜨림

1990 3. 2 몽골 사회민주당 설립

1990 3. 7 오후 2시 10여명의 민주주의자가 수흐바타르 광장에서 단식운동 전개

1990 3.12~14 많은 정당들이 설립

1990 3.21~23 오치르바트가 인민 최고회의 의장으로 선출, 

1990 12.3~11 국가최고회의가 오치르바트를 대통령으로, 곤치르도르찌를 부통령 임명함. Trade and Development Bank 설립. 

1990 3.26  한국과 정식으로 국교가 수립 

1990 6 주몽골 한국대사관(tel : 321548)이 개설.

1991 물가 자유, 달라이 라마 방문, 체덴발(1916~1991) 러시아에서 비밀리에 사망함

1992 국가최고회의의 선거결과 공산당이 76석중 71석 차지, 대통령 직접선거에서 민주당의 오치르바트가 대통령으로 재선됨. 몽골인들 830번째 칭키스칸을 기념하는 축제를 가짐

1993 고비 알타이 지역과 바양헝거르 지역에 무섭게 눈이 내려 심각한 피해를 봄, 자우항 아이막에서 비행기 추락 많은 희생자 냄

1994 달라이 라마 방문

1995 달라이 라마방문, 칭키스칸 호텔 오픈. 흡스걸 아이막에서 비행기 추락 34명 사망 1명 생존. 선생들 파업. 미국 힐러리 클린턴 여사와 아랍에미레이트의 샤흐 방문

1995.10.31  몽골 집권당 총서기 방한 

1996 의회 선거, 민주당과 사회민주당의 민주연합이 승리하여 50석 ,공산당 25석, 보수연합이 1석 확보. 엥흐사이항이 수상으로 임명

1996. 7.11 울란바타르시에 서울의 거리 생김 서울 문화정보센터 오픈

1997 5.18 대통령 선거에서 인민혁명당의 바가반디가 60.79%의 높은 득표율로 제 2대 대통령으로 선출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