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재밋는몽골이야기

몽골 샤머니즘의 생태친화성연구(종교학 전공자 논문)

몽골승마클럽 2006. 12. 22. 19:39

1. 서론 - 생태위기와 샤머니즘 문화

 

생태위기의 심각성에 따라 환경운동의 다양한 흐름이 전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그러나 환경주의자들의 태도는 다소 제한적인데, 그것은 ‘지속가능한 개발(Sustainable Development)’이라는 경제논리적 이데올로기와 결합된 측면, 그리고 그때그때 생겨나는 환경이슈에 대한 부분적 대응과 관련되어 있다.

이러한 태도는 환경운동이 국가의 경제적 경쟁력을 방해하지 않아야만 한다는 의견에 기초해 있다. 이런 제한적 입장은 자연에 대한 전향적 태도와 행동을 방해하므로 생태위기를 본질적으로 극복할 수 없다. 자연에 대한 경제학적 태도는 사회와 환경의 이원론을 초래하며, 결국 환경은 인간, 사회를 ‘위한’ 자원이 될 뿐이다. 그러므로 해리스 존즈(Peter Harries-Jones)는 ‘지속가능한 개발’은 시장의 조정을 통해 환경을 보호할 수 있다는 경제논리에 치우친 이데올로기라고 비판하면서, 지구의 생존은 자연에 대한 근본적 ‘이해의 변화’에 달려 있다고 강조했다.

이런 맥락에서 에코 페미니스트 Gloria Feman Orenstein은 샤머니즘 문화의 ‘대지에 기반한 영성’(an earth-based spirituality)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샤머니즘 문화의 자연이해가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자연과 공존, 협력하는 생활양식을 유지해온 샤머니즘 문화는 자연에 대한 이해를 변화시키는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의 목적은 몽골인들이 견지해온 생태친화적 영성이 어떻게 파생했으며, 그것이 생태계 보전을 위해 어떠한 실천으로 발현했는지를 종교적, 문화적 맥락에서 찾아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 작업을 통해 샤머니즘이 현대 생태위기 극복에 어떠한 기여를 할 것인지를 가늠해보고자 한다.


2. 본론 - 몽골 샤머니즘 문화의 생태친화성

 

드넓은 타이가 숲, 높은 산맥과 커다란 호수, 한없이 높고 푸른 하늘, 끝없이 펼쳐진 초원에서 자연의존적 삶을 살아온 몽골 유목민들에게 자연은 착취와 정복의 대상일 수 없었다. 즉 생존을 위해 필수적인 자연의존적 생활양식은 자연에 대한 순응과 공존이라는 종교적, 문화적 기제를 형성한 것이다. 그러므로 몽골인들이 신이 깃든 성스러운 공간으로 자연을 인식한 것은 이들의 ‘지경(landscape)’과 생활양식을 떠나서는 이해할 수 없다. 자연의 신격화 내지 인격화라는 문화적 맥락이 몽골인들로 하여금 자연과 조화로운 관계를 유지하게 했으며, 이것이 역사적으로 축적되면서 생태친화적 감수성과 생활양식을 형성한 것이다.

 

1) 우주론과 생명 인식

(1) 세 가지 세계, 그 유기체적 관련성과 소통 가능성

샤머니즘의 일반적 세계관은 천계, 지상계, 지하계가 있고, 그 세 차원이 상호 소통함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이해는 몽골 샤머니즘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우선 천계는 ‘멍케 텡그리’(영원한 하늘, Mönke Tngri)의 아들인 Ulgen이 지배하는 곳으로 지상계와 매우 비슷하다. 다만 그곳은 지상계보다 밝은데, 전설에 의하면 천계에는 일곱 개의 태양이 있다고 한다. 지하계 역시 멍케 텡그리의 아들 Erleg Khan이 지배하는데, 그곳에도 숲과 산과 거주지가 있고, 심지어 지하계의 거주민들은 샤먼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샤머니즘의 세계관은 이처럼 신령계를 구별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물리적으로 이 세계와 다른 공간에 위치하는 것은 아니다. 몽골 샤머니즘 신앙민들은 영적 세계와 물질적 세계를 다른 것으로 여기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세 세계는 ‘유사성’을 가지며, 또한 소통 가능하다. 세 세계는 世界樹(Toroo), 世界江, 무지개 등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샤먼은 의례중에 천계와 지하계를 여행하며 신령들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발견할 수 있는 소통의 ‘감각’은 유기체적 사유와 행동을 파생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세계 샤머니즘의 일반적 세계관은 신령계의 일과 인간계의 일이 무관하지 않다는 인식의 공통점을 보여준다. 자연에 의존하며 살았던 생활, 문화조건에서 이러한 인식은 신령들의 거주처인 자연에 대한 친화적 태도를 갖게끔 했다. 즉 지상 생물계의 유기체적 연관성과 그것의 영적 결합을 인식하도록 한 것이다.

샤머니즘 일반이 ‘조화’를 추구하듯, 몽골인들도 생명, 삶의 목적을 ‘세계와의 조화(tegsh)’에서 찾았다. 그러므로 생산력 저하, 질병, 불운 등의 원인을 ‘부조화’에서 찾는 샤머니즘 문화에서 자연과의 부조화 -일방적 지배와 착취-는 존재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2) 생명의 근원 - 하늘과 대지

몽골인들이 생태친화적 사유와 행동을 하게 된 것은 ‘생명의 근원’에 대한 인식 때문이다. 몽골인들에게 인간은 단지 생물학적 관계로 태어나는 존재가 아니라, “커다란 탯줄인 하늘”을 아버지로 “거대한 자궁인 대지”를 어머니로 하여 태어난 존재이다. 즉 생명의 근원이 텡그리와 에튀겐으로부터 온다는 것이다.

하지만 몽골인들은 인간을 구성하는 몸과 영혼의 근원은 구별했다. 즉 하늘은 영원하고 영적인 우주이며 대지는 물질적 세계이므로, 의식과 사고는 하늘로부터 얻고 몸은 대지로부터 얻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삶이란 우주적 생명의 차원을 살아가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생명 이해는 철학적으로 ‘수직’과 ‘수평’의 차원을 담고 있다. 둘람(S. Dulam)은 몽골인들에게 하늘(sky)은 수직적 차원의 ‘높이’를 의미하며 대지는 수평적 차원의 ‘넓이’를 의미하는데, 인간은 이 두 차원을 병행하며 살아간다고 해석했다. 밤에는 수평적 차원에서 지내며 낮에는 수직적 차원에서 지낸다는 것, 인간은 하늘로부터 호흡을 얻고 대지로부터 육체와 뼈를 얻는다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의 생명이 ‘텡그리’와 ‘에튀겐’으로부터 온다는 믿음은 그 유지를 위해서도 또한 텡그리와 에튀겐에 절대적으로 의존해야 한다는 믿음을 초래했다. 텡그리와 에튀겐에 대한 경외감과 절대의존의 감정이 몽골인들의 생태친화적 삶의 근거로서 작용한 것이다. 왜냐하면 불가시적인 텡그리와 에튀겐에 대한 의존은 가시적인 ‘하늘’과 ‘대지’에 대한 의존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자연과 분리되어 이루어지는 인간만의 고유한 생명 과정은 존재할 수 없다.

 

2) Tngri의 생태학적 의미

(1) ‘푸르고 영원한 하늘’(Köke Möngke Tngri)

多神 문화인 몽골 샤머니즘은 아흔아홉 텡그리를 신앙하지만, 그 가운데 최고신인 ‘영원한 하늘(Möngke Tngri)’ 또는 ‘푸른 하늘(Köke Tngri)’이 존재한다. 이 텡그리는 천상의 모든 존재 가운데 가장 높은 만물의 창조자이며 최고 최고 지배자이다. 생명을 유지하는 불과 가축도 그의 결정에 의해 생겨나고 태어났으며, 하늘의 태양과 달과 모든 생명이 그에게 복종한다. 텡그리는 ‘하늘의 아버지’(Tenggeri ečige)이며, 그이게 기도하는 사람들을 보호하고 도와준다.

이러한 신 개념은 자연의 신격화 이상을 의미하는 초월 절대신의 종교성으로 여겨진다. 실제로 멍케 텡그리는 자연적 하늘과 동일한 신격이 아니다. 그런데 이런 최고신 개념은 일반적인 시베리아 샤머니즘의 범신론적 태도와 동일하지 않다. 이에 대해 박원길은 몽골 샤머니즘의 최고신 개념은 칭기스칸의 몽골 통일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고 주장했다. 정치적 차원에서 제 부족을 통합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가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최고신으로서의 텡그리에 대한 신앙이, 자연과 인간의 생명과정과 무관한 초월성으로 경도되지 않았다는 점이 중요하다. 실제 민간신앙의 차원에서는 여전히 자연에 대한 경외감과 의존 감정이 지속되었다. 즉 텡그리를 섬기는 신앙민의 정서가 자연적 하늘, 그리고 대지와 무관한 것은 아니었다. 하이시히(Walter Heissig)는 천상적 실재인 텡그리는 자연의 힘을 신격화하고 초자연적 힘을 추상화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이처럼 높은 산이나 급하게 흐르는 강, 성좌, 하늘을 추상화화고 신격화한 몽골인들은 푸르고 높은 자연적 하늘에서 멍케 텡그리의 이미지를 떠올렸을 것이다. ‘자연적 하늘(Sky)’은 ‘영원한 하늘(Heaven)’의 거주지이기 때문이다.

(2) 자연 현상과 텡그리의 상관성

몽골 고원은 지역과 시간에 따라 기후 변화가 매우 심하다. 몽골인들은 이러한 기후 급변현상은 하늘의 뜻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인식했다. 창조자이자 유지자인 텡그리는 이 세계의 조화, 그리고 기후와 계절의 자연적 과정과 순환을 지배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자연 현상은 그의 의지라고 여긴 것이다. 예를 들면 번개가 치는 것은 텡그리가 불만을 나타낸 것이거나, 혹은 그 자리가 매우 높은 영적 힘을 가진 공간임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만약 텡그리의 불만 표시라면 샤먼은 번개를 하늘로 돌려보내기 위한 의례를 수행했다. 심지어 천둥 소리를 들으면 ‘하늘이 부르짖는다’고 두려워하면서 군사행동조차 멈췄다. 이처럼 바람, 천둥, 짙은 구름, 번개와 구름은 신적인 사건으로 인식했기 때문에 하위 텡그리 중에는 하얀 천둥 텡그리나 비를 내리게 하는 텡그리가 있다고 여겼다.

몽골인들은 이 외에도 다른 여러 자연적 실체들을 신격화했다. 샤먼의 북에 그려진 비너스(Tsolmon) 행성을 영적 힘을 불러일으키는 신으로 섬겼고, 북두칠성은 창조의 원리로 인격화한 ‘일곱 노인’(Doloon Obgon)으로 섬겼으며, 묘성(昴星)도 권능있는 신령으로 숭배했다. 그리고 태양과 달은 텡그리의 눈이라고 믿었으므로, 그 빛은 대지위에 영원히 빛나는 텡그리의 권능을 나타낸 것이었다.

이처럼 자연 현상과 실체들을 신격화하여 인식한 것은 고대 몽골인들의  생존 환경과 관련된다. 그들은 생존을 위해 불가항력적인 자연의 변화에 순응해야만 했으며, 이러한 태도가 자연에 대해 순종적인 행동양식을 갖게끔 한 것이다.

(3) 지역의 지경, 신, 문화와 결합한 아흔아홉 텡그리

몽골 샤머니즘에는 ‘영원한 하늘’, ‘푸른 하늘’ 밑에 다수의 하위 텡그리들이 존재한다. 이들은 흔히 아흔 아홉 텡그리라고 하는데 그 기능이 무척 다양하다. 예를 들면 슬픔에 맞서는 텡그리, 아름다움을 위한 텡그리, 악마에 대항하는 텡그리, 옴을 막는 텡그리 등 다양한 기능을 갖는다.

하위 텡그리들의 숫자가 ‘아흔 아홉’인 이유는 우선 각 지역의 토착적 신을 받아들인 때문이고, 라마교 유입 이후에는 불교의 판테온을 채택했기 때문이다. 텡그리들의 이름이 지역마다 동일하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다. 실제로 텡그리의 이름은 여러가지 부가적 별명으로 변화했다. 예를 들면 부리야트 샤먼의 노래에는 ‘Noyan Babai Tngri’의 이름이 9개 이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것은 텡그리의 대부분이 특별한 지역과 관련하여 존재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하위 텡그리들은 인간 삶의 다양성을 반영하고 있으며, 특히 지경의 다양성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실제로 몽골의 모든 텡그리들은 높은 산이나 급류와 같은 지역적 의미를 지닌 자연현상을 신격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위 텡그리들은 특정한 지역에 거주하는 신격들로써, 각 지역의 지경, 문화와 결합해서 숭배되었다. 그렇다면 물질적 사물과 영적 관념, 혹은 객관과 주관 사이에 절대적 구분을 하지 않았던 몽골인들은 텡그리 숭배와 지경 숭배 역시 구분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샤머니즘의 내재적 신관은 자연을 지배하고 통제하는 자연관을 초래한 서구의 초월적 신관에 대해 의미있는 도전으로 다가온다. 서구 그리스도교의 초월적 신관이 비록 인간을 자연의 ‘지배자’가 아닌 책임적 ‘관리자’로 인식한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신, 인간의 자연에 대한 절대 우위성과 위계성은 존재한다. 결국 자연은 인간에 의해 관리, 보호되어야 할 ‘수동적 대상’인 것이다. 자연을 수단이나 대상이 아니라 ‘형제, 자매’로 대하는 프란치스코적 영성이 중심에 자리하지 못하는 관리자 의식은 여전히 당위성을 벗어나고 있지 못하다.

반면 자연을 신격으로 표현하고 전체 생태계의 구성요소를 구분하지 않는 샤머니즘의 내재적 신 인식은 환경파괴를 초래하는 인간의 오만을 용납하지 않는다. 필자는 이러한 내재적 신관이 갖는 연대성과 초월적 신관이 갖는 윤리적 책임성이 지평융합될 때 생태계 보전을 위한 인간의 노력은 보다 풍부하게 구체화 될 것이다.

 

3) 대지 숭배

몽골인들은 옛부터 대지를 “내 어머니 고향산천”, “내 어머니와 같은 세상”이라 부르면서 친어머니와 같이 받들며 숭상해왔다. 자녀를 낳고 기르는 어머니와 대지를 동일시한 것이다. 대지를 ‘어머니’라고 부르는 것은 대지에 대한 감사와 인격적 애정을 의미한다.

(1) ‘대지 어머니’(Etügen Eke)

몽골인들이 자연에 신성을 부여한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존재는 대지의 여신 에튀겐(Etügen)이다. 에튀겐은 ‘갈색 주름을 가진 어머니 대지’(boro körösütü etügen eke), 혹은  ‘갈색 주름을 가진 황금빛 세계’라고 불리워졌다. 몽골인들은 이 에튀겐이 만물을 있게 하고 보호하는 신이라고 믿었다.

이 에튀겐을 어원적으로 풀어보면, “처음, 어머니, 어머니의 배”라는 뜻이다. 홉스골 호수 서편 주민들은 지금도 여성의 자궁을 “우테게”라고 부른다. 또한 몽골인들은 흙으로 만든 가축 우리를 “어터크”라고 부르며, 항가이 산맥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를 “오트공텡게리”라고 부른다. 여자 샤먼을 “오드강”이라고 부르는 것도 에튀겐에서 유래한 것이다. 에튀겐의 딸이며 세계수에 거하는 육체의 영혼을 돌보는 자궁의 여신 우마이(Umai)는 ‘Tngri Niannian’이라고도 불리우는데, 그 뜻도 퉁구스어 ‘토양(soil)’에서 온 것이다.

이처럼 어머니와 대지가 생명이라는 상징적 차원에서 결합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 신화에도 대지의 여신 가이아(Gaia)가 있었음을 볼 때, 고대인들은 생명의 상징을 대지와 어머니(혹은 여신)의 이미지속에서 동일하게 발견했음을 알 수 있다. 비록 텡그리와 에튀겐을 陽과 陰, 혹은 남성과 여성으로 구별하기는 하지만, 몽골인들은 양 존재를 생명의 근원으로 이해했다는 점에서 에튀겐의 의미는 무시할 수 없다.

한편 에튀겐 이해에 있어 에코 페미니즘(Eco-Feminism)과 관련된 논의를 짚어 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몽골인들의 문화가 매우 가부장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생태친화적 사유와 행동이 이루어졌는가 하는 점이다. 에코 페미니스트들은, 가부장적 문화가 자연에 대한 ‘강간’(정복,파괴)과 결부되어 있으므로 그것을 절멸해야만 생태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남성적 군사문화의 이미지를 강하게 드러낸 몽골은 당연히 생태파괴적 현실에 직면했어야만 하는데, 실제 몽골 문화는철저한 생태친화성을 보여온 것이다. 그 이유는 몽골인들이 ‘아버지 텡그리’ 숭배 못지 않게 ‘어머니 에튀겐’ 숭배를 철저히 신앙화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몽골인들이 인식한 에튀겐과 텡그리의 관계성은 음과 양, 여성과 남성, 대지와 하늘, 남신과 여신의 상극이 아니라 동일한 생명의 원리, 상호의존의 존재양식이었던 것이다.

(2) 신과 신령들의 거주지 대지

에튀겐을 숭배한 몽골인들은 자연 공간을 신성시하여 땅과 숲, 호수와 산이 신의 힘에 의해 살아있는 신령한 존재라고 여겼다. 특히 ‘높은’ 고원과 산은 대지의 지배자와 산의 신령들이 거주하는 곳으로 숭배했다.

여기에서 산에 대한 몽골인의 인식은 생태적 차원에서 큰 의미를 가진다. 몽골인들의 신앙은 ‘산악신앙’이라고도 알려질 만큼 현대에 이르기까지 산을 중시하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59) 높은 산에 대한 숭배의 진지성을 잘 보여주는 것은 산의 실제 이름을 절대 부르지 않는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산은 너무나 성스러우므로 그 이름을 직접 부르는 대신 ‘아름다운’(qayirqan), ‘성스러운’(boϒda), ‘높은’(öndür)과 같은 완곡한 형용사로 찬미한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대지의 다른 요소들에 대한 태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대지는 다양한 신령들의 집이기 때문이다. 이 신령들은 질병과 혼란을 일으키는 chotgor, 중립적이지만 때로 문제를 야기하는 ozoor와 burhan, 그리고 산, 물, 바위, 나무, 정착지, 건물, 국가를 포함하는 공간을 지배하는 gazlin ezen 등이다. 이들은 인간에게 해를 입히기도 하고 역으로 돕기도 하는 존재들이다. 이러한 신령들이 거주하는 영험한 장소인 자연을 훼손하는 것은 신령들을 모욕하는 것이었다. 자연에 대한 모욕은 신령들이 공동체를 공격하는 결과를 가져오며, 반면 신령들을 잘 숭배하면 행운과 다산을 가져온다고 믿었다.

이런 숭배 전통에서 가장 주목할만한 것은 대지와 물의 주인 ‘로스(水神)-사브다크(地神)’에 대한 신앙이다. 로스와 사브다크를 ‘로스-사브다크’라고 부르는 이유는 대지와 물이 분리될 수 없다는 믿음 때문이다.

우선 사브다크는 구릉 위의 건조지대에 집을 짓고 살며, 그곳의 흙 위에 흔적을 남기며 돌아다니다가 산기슭의 땅 속으로 스며들어가는 신이다. 홉스골 주민들은 사브다크를 인간과 동물의 형상으로 묘사하여, 토양은 동물의 가죽, 흙과 돌 및 식물의 뿌리는 육체, 힘줄, 혈관이라고 믿었다. 따라서 땅에 기둥, “숑”을 세우거나 못을 박는 것, 땅을 파헤치거나 뒤엎는 행동을 금기시했다. 불가피하게 땅을 파면 일을 마친 후 사브다크의 상처를 아물게 하기 위해 말뚝이나 숑을 뽑고 구멍을 메꾸는 ‘치병의식’을 행했다. 그리고 사브다크를 더럽히지 않기 위해서 다른 곳으로 이주하기 전에 게르를 쳤던 자리와 주변, 버려진 쓰레기들을 말끔히 청소한 후, 깨끗해진 터에 향을 피워 사브다크에게 그동안 잘 사용한 땅을 돌려준다는 의식을 행했다.

물의 주인 로스(水神)는 물의 표면에 사는 신이다. 물, 특히 강물의 발원지는 로스의 거처하는 집이다. 물은 로스가 사는 집이므로 우유, 피, 각종 쓰레기, 특히 머리카락 같은 것을 물에 버려서는 안된다. 또한 불과 물은 상극이므로 강의 근원지에서 불을 피우지도 않고, 잠을 자지도 않았다.그리고 두 개의 강 사이 초지에 게르를 치고 정착하는 것도 금기시했다.

이러한 로스-사브다크와 인간의 연계는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로스-사브다크는 죄없는 자를 괴롭히지 않지만 인간의 그릇된 행동에 대해서는 매우 엄하고 매섭게 대한다고 믿었다. 가뭄, 폭우, 우박 등의 자연적 재난, 죽음, 고통, 병과 같은 고난은 로스-사브다크가 인간에게 내리는 죄의 값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험프리(C. Humphrey)도 보고한 방뇨 금지 장소(강, 천막, 길가, 다른 생명체의 영역), 흐르는 물에서 씻어서는 안된다는 것 등의 금기 조항에서도 볼 수 있다. 금기 조항의 핵심적 의미는 인간과 모든 생명의 보호자인 신을 모욕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며, 이것이 다른 생명체의 공간을 함부로 침범하지 않는 생태친화적 태도를 형성한 것이다.

(3) 오부(Oboo)와 대지 숭배

역사적으로 다양한 성격과 의미를 담아온 오부는 몽골 샤머니즘의 핵심적 상징이다. 오부의 성격은 지역 신의 거주 장소이며 신들의 모임 장소이다. 신들은 주로 매우 영험한 산신들이므로, 몽골인들은 사냥의 성공과 식물을 얻기 위해 이들에게 기도해왔다. 몽골인들이 오부 의례를 중시한 것은 바치는 제물 중 첫째로 드는 것이 ‘떡’이었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곡물이 희박할 수 밖에 없는 유목사회에서 떡을 바친다는 것은 최고의 존경을 표한 것이다. 이 오부 숭배는 춘분과 하지에 이루어지는 씨족 의례와, 그 곁을 지나는 여행자들이 세 바퀴를 돌며 돌을 올려놓는 개인 의례로 지금까지도 내려오고 있다.

이러한 오부의 생태학적 의미는 산정(山頂)이라고 하는 그 위치에서 찾아볼 수 있다. 물론 초원지대나 지역의 경계에도 오부가 있지만 특별히 신성시하는 오부는 대부분 높은 산의 정상에 있는 것들이다. 데 마르하호는 유명한 산(보르칸-칼돈 산, 항가이항, 멍항, 제트히항 등)에 하나같이 “항(Khan)"이라는 칭호가 붙은 것을 보고했다. 그것은 ‘높이’의 성스러움에 대한 감각을 발달시켜 고산 숭배라는 종교적 양식을 빚어낸 몽골인들의 종교성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높은 산의 정상이라는 것은 하늘과 땅이 가장 가깝게 접촉하는 곳을 의미한다. 즉 산정은 텡그리에 가장 가까우므로 영험한 장소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샤머니즘적 인식체계를 가진 민족은 하늘의 뜻이 산정이나 숲, 나무의 끝단을 통해 강림한다고 믿었다.

이처럼 하늘과 대지가 만나는 곳에서 생명의 근원을 상징적으로 이해한 몽골인들은 영험한 오부가 있는 산을 성역화했다. 그래서 그곳의 풀과 동물, 심지어 돌까지도 함부로 다루지 않는 경외감을 형성한 것이다. 오부 의례가 생태학적 의미를 갖는 것은 그 때문이다.

(4) 조상 숭배와 대지 숭배의 결합

대지에서 성스러움을 인식한 몽골인들이 높은 산과 큰 호수, 너른 대지를 훼손하거나 파괴하는 것은 자신들의 생명의 뿌리에 대한 부정에 다름 아니었다. 우리는 여기서 자연의 부정과 인간의 부정이 동일시되고 있다는 점, 그리고 그 안에 인간적 맥락이 결합해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인간적 맥락이라 함은 조상숭배와 관련된 것에서 설명할 수 있다.

몽골인들은 조상의 신령이 대지의 신, 지역의 신령과 유사해진다고 믿었기 때문에 조상을 높은 지대에 매장하는 풍습을 지켜왔다. 그것은 죽은 조상의 신령이 자연속에 거주하며 후손들을 돕는다는 믿음과 관련된 것이다. 그렇다면 산, 강, 숲과 바위, 나무들은, 한 때 인간의 영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조상의 영혼이 깃든 곳이고, 훗날 자신의 영혼도 들어가게 될 자연을 파괴한다는 것은 자신의 근거를 허무는 자살행위와 마찬가지인 것이다.

이와 같은 인간적 맥락은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있어서 ‘책임성’을 형성하는데 기여할 수 있다. 단순한 두려움으로 자연의 위력에 굴복하는 것, 혹은 신들의 단순배열로 자연을 이해하는 것이 자연의 성스러움을 인식하게 하는데 복무하겠지만, 인간의 능동적 책임성을 간과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지 숭배가 인간적 맥락에서 조상숭배와 결합할 때, 자연을 훼손하지 않는 것은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고 그 영혼의 자리까지 지켜가는 것이므로 보다 강한 책임적 태도를 형성할 수 있는 것이다.

 

4) 수렵유목 문화의 동물 인식

일부 동물 권익 지지자들은 수렵사회의 사냥에 대해 피상적 반감을 가지고 있어서, 그것이 수렵민들의 삶에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사냥을 반대하는 로비활동이 수렵 부족들의 생존을 위협하며 갈등을 초래하기도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필자가 살펴본 수렵문화의 성격은 동물권익 지지자들의 인식이 오류임을 밝혀줬다. 오히려 인간과 동물의 ‘상호의존성’과 ‘협력’을 중시하는 수렵문화는 생명력의 순환이라는 차원에서 생태계 보전을 위한 의례적, 경제적 장치들을 어느 사회보다도 고도로 발달시켜왔다. 몽골의 수렵, 유목문화는 그것을 잘 반영하는 사례이다.

(1) 신화에 나타난 동물 인식

동물을 존중하는 태도의 종교적 맥락은 첫째, 씨족의 상징적 조상, 토템으로 간주되는 동물(푸른 늑대, 붉은 사슴, 황소 등)이 있다는 점, 둘째, 동물신령은 샤먼의 안내자이자 교사로 간주된다는 점에서 잘 드러난다.

일반적으로 시베리아 신화에 나타난 동물들은 창조를 도왔던 영험한 존재들로써 숭배의 대상이다. 또한 동물의 속성을 신화적으로 재구성한 몽골신화에서도 샤머니즘적 인식의 특성을 발견할 수 있다. 몽골 신화에서 깃털은 천상적 존재의 비유였는데, 그것은 새들은 하늘로 날아가는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인간과 뭍짐승들은 땅에서 살아가므로 지상적 존재의 비유였고, 파충류와 어류, 곤충은 땅 밑과 물 밑으로 다닐 수 있으므로 지하와 수중세계의 존재를 비유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몽골 신화에서는 인간과 동물의 대립을 볼 수 없다. 동물이나 사람이나 모두 “중간 세계에서 태어나고 자라는 살아있는 피조물”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동물관은 중요한 의례에서 동물에 대한 존중과 배려를 빠뜨리지 않게 한 원인이었다. 과거 대칸의 즉위 의례가 있었을 때 “이 성스러운 향연에 자연계의 미물들도 참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말타는 행위, 가축에 짐을 싣는 행위, 가축을 죽이는 행위, 사냥, 고기잡이, 땅을 파는 행위, 물을 휘저어 오염시키는 행위등을 모두 금했다.”는 기록은 그것을 잘 보여주는 자료이다.

동물은 인간이 살아가는 세계의 창조에 협력했으며, 씨족의 조상이기도 하며, 또한 세 차원의 세계를 소통하게 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러한 동물을 함부로 대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2) 사냥의 의례적 성격

사냥은 ‘죽임’을 뜻하므로 흔히 자연에 대한 파괴 행위로 여겨진다. 하지만 생존의 차원에서 사냥을 해야만 했던 수렵사회를 같은 관점에서 볼 수는 없다. 몽골인들에게 사냥은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살생이었다. 그러므로 필요없는 살생은 절대적으로 피했으며, 불가피한 살생의 경우에도 체계화된 의례양식에 따라 적합하게 이루어졌다.

우선 죽임의 ‘최소화’를 보여주는 것은, 사냥의 목적이 먹을 것을 구하거나 모피를 얻기 위함이 아니면 금지했다는 점과 사냥한 동물은 반드시 공동체적으로 공유했다는 점이다.

사냥 과정에서도 피해야 할 여러 가지 타부가 있었다. 사냥군들은 숲에 들어가면 웃거나, 달리거나, 큰 소리를 지르거나, 막대기를 던지거나, 물에 돌을 던지거나 방뇨하는 것을 타부시했다. 그것은 신령을 모욕하는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런 타부는 사냥 자체가 동물의 신령들에 대한 ‘경외감’을 가지고 수행하는 일종의 의례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불가피하게 동물을 죽이는 경우에도 ‘인간적’ 방식으로 매우 빨리-고통을 덜어주기 위해-죽여야만 했으며, 또한 ‘죽임’ 행위는 의례적 성격을 띄고 있었다. 커다란 동물을 죽이거나 큰 물고기를 잡으면 사냥군이나 어부는 그 신령을 위로하기 위해 커다랗게 울면서, 자기들이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고기를 먹어야만 했다고 ‘말하며’ 사죄해야 했다. 가축을 죽일 때도 마찬가지였다. 가축의 머리는 자르지 않았는데, 목을 자르는 것은 가축의 ‘Ami’를 손상시킨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몽골인들은 이러한 의례와 규칙을 잘 지켜야 동물의 신령들이 인간에게 우호적 태도를 취하여 사냥감을 계속 얻도록 도와준다고 믿었다. 이런 태도를 ‘숭배와 잔인성의 복합’이라고 보기도 하지만, 몽골의 사냥 의례에서 중심은 ‘숭배’의 차원이었다. 그것은 수렵사회 사람들의 생존과 직결된 것이기도 하다.

(3) 유목 목축과 동물에 대한 정확한 지식

자연에 대한 ‘정확한 지식’의 획득은 생태친화적 세계관 구성에 있어서 필수적 요소이다. 그러나 서구 근대과학의 이해틀에 갇힌 사람들은 샤머니즘 문화의 자연 이해를 신화적, 상상적 인식에 기초한 미개한 것으로 폄하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근대과학의 오만으로, 새로운 과학운동(신과학)의 확산과 함께 근본적인 의심을 받고 있다. 샤머니즘의 자연관은 오랫동안 축적된 ‘에피스테메적 지식’에 기반하고 있으며 문화적 차원에서 충분히 합리적 근거를 갖고 있는 것이다.

일례로 몽골어에는 유목생활과 관련하여 말의 털색깔에 관한 방언이 300가지 이상이고, 말의 움직임에 관한 용어만 30가지 이상이며, 동물의 성격에 대한 것이 약 100가지, 동물의 기관 명은 약 400가지가 넘는다. 이처럼 동물의 속성에 대한 용어가 매우 다양하다는 것은 동물과 의존적 관계를 형성하며 살아온 유목민들의 ‘지식’이 풍부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효과적 목축(동물의 건강과 다산)을 위해 동물의 생리학적, 행동학적 성질을 깊이 관찰해야만 했던 몽골의 유목사회적 조건에서 기인한 것이다.

한편 대규모 농경이 이루어지기 어려운 환경조건에서 철을 따라 가축들에게 먹일 풀을 찾아 이동해야만 했던 유목민들은 풀의 나고 시듦과, 대기의 순환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가져야만 생존할 수 있었다. 이 ‘이동성’과 관련된 지식은 자연을 변형하고 개조하는 것보다는 ‘순응’의 생활양식을 발달시켰고, 그 결과 자연에 대한 ‘정확한 지식’에 부합하는 순응적 자연관을 형성한 것이다.

(4) 생명력의 제한성과 영혼의 순환

동물에 생계를 의존하고 있는 유목민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동물의 지속적 재생산이며, 샤머니즘 의례는 동물신령의 힘을 이용하여 경제적 자원의 지속적인 재생산, 즉 ‘동일한 자원의 반복적 취득과 사용’을 가능하게 하는 기제이다. 이러한 기제의 상징은 ‘영혼의 순환’이며, 이는 생명력의 제한성이라는 것과 결합하고 있다. 자연의 생명체는 그 영혼이 새로운 생명체로 재생하거나 재생하지 않으므로 제한적이다. 그것을 줄이지 않기 위해서는 반드시 재생하도록 동물의 신령을 위로하고 달래야 했던 것이다.

이처럼 몽골인들이 사냥과 목축에서 동물에 대한 타부와 의례를 수행한 이유는 동물에게도 영혼이 존재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전형적으로 몽골인들은 ‘Suld’(죽음 후에 자연에 거주), ‘Suns’(재생하는 것), ‘Ami’(재생하는 것)의 세가지 영혼이 있다고 믿는다. 이중에서 동물은 ‘Suld’를 제외한 나머지 둘을 가지고 있다. 동물을 몽골어로 ‘Amitan’이라고 부르는 것은 동물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살아있는 몸의 호흡과 온기를 갖게 하는 ‘Ami’를 소유하고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 ‘ami’는 보통 같은 종으로 다시 돌아온다. 죽은 사슴은 다른 사슴으로 돌아오고, 죽은 곰은 다른 곰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몽골인들은 동물도 영혼을 가지고 있으므로 인간처럼 인격, 언어, 심지어 심리를 갖고 있다고 여겼다. 따라서 경외감을 갖지 않고 함부로 살생을 하면 동물의 영혼은 공격적으로 바뀌어 인간을 괴롭히거나, 사냥터로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고, 심지어 다른 동물 신령들에게 도망가라고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처럼 죽은 동물의 영혼은 같은 동물로 다시 돌아오거나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몽골인들의 믿음은 생명력의 제한성에 대한 두려움의 반영이다. 이런 불안은 아무리 사냥감이 풍부해도 필요 이상으로는 남획할 수 없다는 생명존중의 문화를 만드는데 기여했다.

하지만 고대부터 지속된 이러한 유목 목축이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지, 그리고 동물과 자연에 대한 유목민들의 사유와 행동은 여전한지에 대한 의심이 있을 수 있다. 그것은 몽골의 사회주의 시기 아이막(州)의 경계를 넘어설 수 없도록 이동을 제한한 분리정책, 그리고 현대 몽골인의 25%가 울란바타르에 모여 사는 경제적 구조의 변화와 관련한 것이다.

그러나 사회주의 체제 붕괴 후 매우 광범위한 재유목화가 진행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지방 관청의 붕괴와 함께 재유목화, 세대 단위를 기초로 한 사회조직이 부활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같은 사회주의권이었던 시베리아 지역의 자연의존적 유목경제와 원주민 민족문화의 부활과 같은 맥락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재유목화한 몽골 유목민들은 유목의 지속과 함께 유목민 특유의 자연 감각을 회복하고 있다. 이 점에서 사회주의 붕괴 이후 변화하고 있는 유목민들의 문화, 종교적 태도등에 대한 연구가 요청된다.

 

5) 일상 공간의 성화와 인간의 위치

(1) 일상 공간의 성스러움 - 세계의 중심, 게르(Ger)

세계의 ‘중심’이라는 상징은 ‘성스러움’과 관련되므로 더럽힐 수 없다. 만약 모든 인간이 자신의 일상적 생활공간을 세계의 중심으로 인식한다면 오염과 파괴의 생활 양식은 존재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대개의 문화에서는 일상적 공간과 성스러운 공간이 구별되어 있다. 이는 성역에 대한 경외감과 세속적 일상에 대한 폄하를 불러일으킨다. 물론 성역의 구별이라는 관념은 몽골인들에게도 ‘聖山’의 구별과 경외감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몽골 샤머니즘의 특성은 그 성역을 일상적 삶의 공간으로 확장한다는 점이다. 그것을 잘 보여주는 것은 정주적 주거문화와 상반하는 이동적 주거공간 게르와 관련된 사유체계와 의례이다. 한 시간이면 해체하고 세울 수 있는 게르는 몽골 유목문화의 이동성이 만들어낸 독특한 주거 양식이다. 철에 따라 초원을 돌아다녀야 했던 유목민들에게 정주적 주거공간은 적절하지 않았던 것이다.

게르와 관련된 의례체계는 몽골인들이 게르를 우주의 중심으로 생각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몽골의 모든 유목민들은 세계의 중심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게르는 그 자체로 작은 우주이기도 하다. 게르의 중심에는 소우주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가장 성스러운 장소 ‘Gal Golomt’가 위치한다. 그것은 현상적으로는 화덕일 뿐이지만, 멍케 텡그리의 딸인 ‘Golomto’가 거주하는 곳이라 여겨 신성시했고, 땅과 하늘을 연결하는 축이 만나는 장소로 여겼다. 이 게르의 수직적 기둥은 ‘世界樹’를 상징하는 것으로 샤먼은 이것을 통해 천계로 올라간다. 그리고 천장의 연기 구멍(toroo)는 천계로 들어가는 입구에 해당한다.

이 세계의 중심 게르에서 이루어지는 의례는 샤먼만이 아니라 여성 주부들에 의해서도 일상적으로 행해졌다. 몽골의 여성 주부들은 매일 게르 주변을 돌면서 우유와 차를 네 방향-동서남북-의 각각에 세 번씩 가볍게 뿌린다. 사촐리라고 부르는 이 의례에서 남쪽을 향해 뿌리는 것은 불에 대한 것이며, 동쪽을 향해 뿌리는 것은 하늘에 대한 것이며, 서쪽을 향해 뿌리는 것은 물에 대해서, 북쪽을 향해 뿌리는 것은 조상에 대한 것이었다. 한편 게르 안의 부엌과 조리용품을 늘 깨끗이 해야 했는데, 그것을 더럽히는 것은 멍케 텡그리를 모욕하는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러한 게르의 일상적 의례는 우주적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게르를 우주적 상징으로 인식하여 일상적 공간을 성화한 것, 그리고 인간이 어느 곳에 거주하든지 그곳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믿음은 생태계에 대한 인간 삶의 책임적 위치와 관련된다. 유목문화의 이동성은 세상의 모든 곳을 ‘중심’으로 성화하고 모든 지경을 숭배하는 상징적 행위인 것이다. 또한 이동성은 인간이 땅을 소유할 수 없다는 인식의 토대가 되었다. 실제 몽골 유목민들에게 땅은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브다크 혹은 에튀겐으로부터 잠시 빌려서 사용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소유대상이 아닌 대지를 인간 마음대로 파헤치거나 개발할 수 없는 것이다.

(5) 부얀의 생태학적 적용

인간은 하늘로 올라가거나 땅과 지하계로 내려갈 수 있는 살아있는 존재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위와 아래’ 사이, 즉 세 세계의 ‘중간’에서 살기 때문이다. 중간계(지상세계)에 존재하는 인간이 다른 세계로 여행할 수 있다는 믿음은 전체 생명계의 유기체적 관계성을 함의한다.

이처럼 실재와 접촉하는 인간의 역할을 잘 보여주는 것은 ‘Buyan’ 관념이다. ‘福’, ‘富’의 의미를 갖는 부얀은 하늘이나 신령들이 주는 것으로, 인간의 행동에 따라서 늘어날 수도 있고, 줄어들 수도 있다. 따라서 부얀을 얻기 위해서는 신과 신령을 노하게 하지 말아야 하며, 적절한 시기에 신들을 기쁘게 하기 위한 의례를 행해야 한다.

의례에서 나타나는 여행과, 부얀의 활성화는 샤먼의 중요한 임무였다. 몽골 샤머니즘에서 하늘과 접촉할 수 있는 샤먼은 “최고의 하늘”, “위대한 하늘”, “작은 하늘”, “위대한 샤먼”이라는 칭호를 얻고, 반면 대지의 신령과 접촉하는 샤먼은 “성스러운”, “영광스러운” 그리고 “위대한 여성 샤먼”이라는 칭호를 얻는다. 이들은 강력한 신령의 침입이나 재난으로 조화가 깨어졌을 때는 영험을 이용하여 환자와 텡그리를 다시 연결시키고, 우주적 조화의 상태를 회복시키는 역할을 수행했다.

여기서 부얀의 생태학적 의미는 인간과 자연의 부조화는 결국 인간의 삶을 황폐하게 만들고, 생존의 기반을 위태롭게 한다는 점에서 찾아질 수 있다. 다시 말해 생태학적 위기란 곧 부얀이 급격히 줄어든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는 베이트슨(Gregory Bateson)이 내재적 신인 ECO는 인간의 침입을 용서하지 않는다고 한 것을 상기시킨다. 즉 생명유지의 부얀은 저절로 늘어나지 않는다. 오직 인간이 생태친화적 경외감을 회복하여 자연과 신 앞에 겸손해질 때 회복되는 것이다.


【 결론 - 현대 생태위기 극복을 위한 샤머니즘 문화의 기여 】

비테브스키는 종교가 생태환경과 밀접히 관련되는 경우에는, 환경이나 삶의 양식에서의 변화가 반드시 종교의 구조나 행동의 변화를 수반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관점에서 몽골 샤머니즘의 생태친화적 성격은 그들의 유목사회적 조건에서 파생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결론은 고도 산업문명속에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오히려 절망감을 안겨줄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산업사회의 현대인들은 고대 몽골인들이 살았던 삶의 조건을 똑같이 체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현대 몽골인들에게서도 마찬가지 이다.

현대 몽골 역시 사회주의 시기 산업화를 경주해왔고, 자본주의를 수용한 이후에는 부분적으로 재유목화가 진행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는 경제성장을 최우선 가치로 하는 경쟁체제에 진입했다. 몽골의 생태친화적 문화 역시 이미 변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 몽골의 변화가 선진국들의 생태파괴 경험을 반복할 것인지, 아니면 그동안의 문화적 경험을 바탕으로 최소한 ‘지속가능한 개발’의 원칙이라도 지킬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다. 현대 몽골에서 ‘에코 투어’라는 이름 하에 동물을 사냥하는 관광상품이 외지인들을 유혹하고 있고, 자원 개발과 산업 오염이 급증하고 있는 것을 볼 때 그 전망은 그리 밝지 않다. 현재는 러시아 영토이긴 하지만 부리야트 몽골 지역의 바이칼호는 최근 인근 바이칼스크시의 제지공장에서 쏟아내는 염소(CL) 폐기물로 급속히 황폐화되고 있다. 지난 89년에는 이 호수에 서식하는 물개들이 집단폐사했으며, 호수 서식생물 대부분에서 치명적 수준이 다이옥신이 검출됐다. 지난 93년 환경단체의 압력에 의해 제지공장 폐쇄 직전까지 갔던 이르쿠츠크 주 정부는 제지회사측의 로비를 받고 결정을 철회했다. 그것은 공장에서 내는 세금이 주정부 재원의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는 현실적 요인 때문이었다. 세계 담수의 5분의 1을 저장하고 있는 수자원의 보고도 결국 눈 앞의 경제적 동기에 의해 치명적 위기를 맞고 있는 것이다. 결국 샤머니즘 문화의 생태친화적 모델은 급격히 붕괴되고 있으며, 변화하는 사회,경제적 상황에서 샤머니즘의 자연관이 주는 도전과 의미 역시 위축되고 있다.

그렇다면 고대 몽골인들이 보았던 ‘푸르고 영원한 하늘’을 잃어버린 채 '잿빛 하늘' 아래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샤머니즘 문화는 막연한 매혹과 동경일 뿐인가? 점진적 자살의 길로 들어선 인류는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지점을 지나버렸는가?

이런 당혹스런 현실은 우리가 생존의 절박함에 직면해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지금의 생태위기의 극복은 인류의 생존을 위해서 반드시 수행해야만 하는 절대절명의 중심과제이다. 그것은 Peter Harries-Jones의 주장처럼 자연의 다른 주체 즉, 동식물, 신령들과의 소통을 통해서 인간은 생존한다는 ‘생존의 인식론’을 수립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것은 자연과 공존해야만 생존을 지속할 수 있다는 것, 그러므로 자연은 자원이 아니라 인간과 공동운명체라는 생태친화적 문화를 긴박하게 형성하는 것이다.

이러한 생존의 인식론에 근거하여 우리는 환경에 대한 인식을 새로이 해야 한다. 이에 대해 잉골드(Tim Ingold)는 환경의 역사란 인간을 포함한 유기체들이 태고로부터 현재까지 행동한 것의 역사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환경에 속한 인간이 그 연결고리를 끊는 것은 결국 자신을 인간으로 만든 역사적 과거로부터 끊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환경이 하나의 ‘역사’라고 한다면 아직 우리에게 가능성은 남아있다. 역사에 완성은 없기 때문이다. 즉 지금까지 오랫동안 자연을 배반한 역사를 살아왔지만 자연에 대한 근본적 태도를 정정할 수만 있다면 앞으로의 역사 또한 변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배반과 정복과 착취의 역사를 중단하고 자연과 공존하는 생태친화적 역사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또한 환경의 역사가 하나의 단일한 모델로 발전해오지 않았다는 점도 생존의 가능성을 반증하는 것이다. 근대 산업혁명 이후 형성된 환경의 역사와 달리, 오랫동안 자연에 순응하며 친화적 태도를 형성해온 환경의 역사 또한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을 지탱해온 그리스도교 신비주의 전통, 동양종교, 그리고 샤머니즘 문화의 자연관은 위기 극복의 현실적 대안을 수립하기 위한 자원으로 새롭게 재해석, 복원될 수 있을 것이다. 유목민들의 의례와 사회생활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온 샤머니즘적 세계관과 자연관, 영혼관 등이 전통의 잔재가 아니라 현재의 문제에 대한 현실적 대응이라는 점은 위기 극복의 가능성을 의미한다.

'현실적 대응'의 실례는 아직 샤머니즘 문화의 사회적, 경제적 여건을 유지하고 있는 재유목화 사회, 토착민 사회에서 나타나고 있다. '지속가능한 개발' 이데올로기에 근거한 환경주의자의 태도보다는 토착민의 샤머니즘적 태도가 생태위기 극복의 근본적 해결책이라는 점은 북유럽과 알래스카, 세계 도처에서 강력히 검증되고 있다. ‘자원’의 보호와 ‘생명 근거’의 보호중 무엇이 근본적 해결에 동력을 부여할 것인지는 명백하기 때문이다.

또한 산업사회의 현대인들에게도 샤머니즘 문화는 세계관의 정정이라는 차원에서 ‘현실적 대응’의 성격을 갖는다. 린 화이트(Lynn White)는 생태위기의 근본을 그리스도교 세계관에서 찾았지만, 위기의 근원이 세계관이므로 치유의 과정도 세계관이라고 주장했다. 화이트가 프란치스코를 생태계의 수호 성인으로 재해석한 것은 그 때문이다.

세계관이 문제 해결의 근본이라는 점은 현대 과학기술의 불안정성에서 반증된다. 예를 들면 프레온 가스가 오존층을 파괴하는 치명적 물질이라는 것을 알기까지 50여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지금도 한 해 500여종 이상씩 새로 만들어지는 화학물질이 장기적으로 어떠한 결과를 가져올지는 예측할 수 없다. 중심이 되어야 할 것은 새로운 ‘환경기술’이 아니라 생태친화적 세계관을 수립하는 것이다. 인간의 편리를 위해 자연을 마음대로 변형하는 도구적 자연관, 위계적 세계관을 벗어나야 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필자는 생태친화적 세계관 회복을 위해 몽골 샤머니즘 문화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을 다음의 세 가지로 제안한다.


첫째, 물질-영혼, 자연-문화 이원론 극복

자연파괴의 원인이 이원론에서 출발했다고 하는 것은, 물질과 영혼, 자연과 문화, 신령과 인간을 구분함으로써 각 항목의 ‘전자’들을 대상화, 열등화했다는 의미이다. 이에 대해 본질적으로 물질적 존재와 영적 존재, 자연과 인간의 문화를 구분하지 않는 샤머니즘의 태도는 이원론을 지양하는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물질(자연) 안에 신령이 존재하고, 존재하는 모든 것은 성스러우며, 또한 문화의 과정은 자연의 과정과 다른 것이 아니라는 인식에서 인간/자연의 위계적 사고는 해체될 것이다.

둘째, 상호의존의 생태학적 감수성 복원

카프라(Fritjof Capra)는 현대 위기의 본질은 기계론적 세계관이 초래한 ‘감수성의 위기’라고 진단했다. 따라서 위기의 극복은 생태친화적 감수성의 회복에서 출발해야 한다. 카프라는 이러한 감수성을 인간과 우주가 완전히 합치하는 강렬한 생태론적. 종교적 체험이라고 주장했다. 샤머니즘의 '옴살스러운'(holistic) 세계관과 삶의 양식은 생태학적 감수성 복원의 한 모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지역적 실천

샤머니즘은 보편적 환원주의가 아니라 구체적인 지역 문화의 맥락에서만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  샤머니즘의 생태친화적 문화는 세계 보편적인 철학이나 교리를 수립하기 위한 과정에서 파생한 것이 아니라, 샤먼과 그 신앙민들이 살고 있는 구체적 삶의 자리, 지경에 대한 문화적 해석과 결부된 것이기 때문이다. 샤머니즘의 이와 같은 지역적, 문화적 맥락은 현대 환경운동의 슬로건인 ‘지구적 사유(think globally)와 지역적 행동(act locally)’에 부합한다.

이상의 논지에서 우리는 생태친화적 종교․문화가 자연을 보전하는데 핵심적 기여를 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즉 어떠한 문화를 수용할 것인가에 따라 생태위기는 극복할수도 있고, 역으로 심화될 수도 있는 것이다. 또한 산업사회의 경우 여전히 자연에 대한 정복주의적 문화가 지배적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절대적이지는 않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그것은 현대사회가 ‘多文化性’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의미한다. 현대는 한 사회 안에 ‘다른’ 문화가 들어와 충격과 도전을 주어 自文化에 대한 반성을 이끌어낼 수 있도록 하는 문화간 교섭과 종합이 가능한 시대이다. 몽골 샤머니즘 문화가 과학기술혁명의 시대를 살아가는 서구와 산업국가의 현대인들에게도 자연에 대한 인식론적 반성과 실천적 전환의 자원이 될 수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작성자: 정경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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