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재밋는몽골이야기

몽골 의식주 문화

몽골승마클럽 2006. 12. 25. 20:30

# 의(衣)

 

 

 

 

 

몽골인이 즐겨입는 전통의상은 우리나라의 두루마기와 닮은 겉옷 델(Del)과 모자격인 말라가이(malagai), 긴 장화 모양의 신발인 구탈(Gutal)이다. 델은 우리나라의 두루마기에 옷고름 대신 단추를 달아 놓은 것처럼 생겼다. 목부분은 턱 밑까지 치켜 올라가 있고 소매는 손이 감추어질 정도로 길다. 허리띠를 매도록 되어 있고 무릎부분까지 내려온다.
말라가이는 모자를 비롯해 머리에 씌는 장식이다. 구탈은 발톱 앞이 위로 치솟아 있으며 뒤꿈치가 없고 발목이 무릎 가까이 닿도록 깊다. 앞쪽의 뾰족한 부분은 땅이 패이지 않고 말을 탈 때 안장이므로 발을 걸어 쉽게 타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몽골에서는 지금까지 부인네들이 거의 모두 머리에 수건을 쓴다. 울란바토르 일대의 여성들은 대체로 붉은 빛깔의 수건을 쓰지만 서북지방의 카자흐족 여성들은 흰빛의 수건을 쓴다. 또한 몽골 부인들은 우리와 비슷한 연지를 두 볼에 찍는다. 우리와 다른 점은 혼례식 때가 아니라 평소 모양낼 때, 그리고 반드시 부인들이 찍는다는 사실이다.

혁명 전에는 모든 사람들이 델을 입었는데, 이것으로 지위, 종족, 계급 등을 알 수 있었다. 얼마 전 까지만 해도 남녀노소 누구나 소매가 긴 옷을 입는데 여름에도 짧은 소매는 입지 않는다. 이는 추위와 바람으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서인데 특히 여름의 적은 강우량, 건조한 날씨, 강한 햇빛으로부터 몸의 수분을 보호하려는 몽골인의 생활관습이다. 아직도 거리에서 델을 입은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 식(食)
· 하얀음식 & 빨간음식
몽골초원민의 식탁은 '하얀음식'과' 빨간음식'으로 채워진다.
'하얀음식'은 가축의 젖으로 만든 각종 유제품을 총징하는 말이다. 여름에서 가을까지 충분히 짜낸 우유로 여러 가지 유제품을 만든다. 유제품은 보존식품으로서 1년내내 먹는 음식이다. 그러나 그 질과 양에서 유제품이 가장 풍성한 계절은 역시 여름이다.
한편 '빨간음식'은 가축을 도살하여 얻은 육류를 총징하는 말이다. 가을에 통통하게 살찐 가축을 도살해 혹한기에 대비한다. 따라서 육식이 가장 풍성한 계절은 기본적으로 겨울이다.
몽골초원민의 식탁은 이와 같이 여름을 정점으로 하는 '하얀음식'과 겨울을 정점으로 하는 '빨간음식'이라는 명료한 계절성을 갖는 두 가지 주식에 의하여 유지되고 있다. 모두가 가축이 가져다 주는 큰 선물이다. 여름날 몽골초원에서는 많은 유목민들이 유제품을 널빤지에 펴거나 가죽부대에 넣어 천막 위에서 햇볕에 말린다. 유제품을 말리기 위한 받침대를 마련하기도 하고, 새의 피해를 막기 위해 죽은 까치를 매단 경우도 여름철 몽골초원에서는 좋은 구경거리가 된다.
· 음식의 의미
일반적으로 '하얀음식'은 그 색깔때문에 청렴과 진심을 상징하는 것으로 인식된다. '하얀음식'에 더하여 '빨간음식'은 풍성함을 나타낸다. 몽골의 대표적 화가 '샤라브'가 그린 가을풍경 속에도 양의 도살장면이 포함되어져 있는데 양을 여덟개 부위로 해체해서 삶은 후 살아있을 때와 비슷한 모습으로 그릇에 담아 내놓는다. 그것은 슈우스라 불리고, 초원에서 최고의 접대요리이다.
· 보존방법
겨울의 도축기에 도살한 고기의 경우 양은 덩어리째 보존하고 소는 대부분 육포와 같이 찢어 말린다. 그리고 이처럼 찢어서 말린 고기를 보르츠라 한다. 보르츠를 갈아 만든 가루는 훌륭한 휴대식량이 된다. 내장도 또한 부위에 따라 가공된다. 약용으로 사용되는 쓸개를 빼고 어느 하나도 버리지 않는다. 특히 '빨간음식'의 지방질은 혹한기를 견디는데 중요한 칼로리원이 되기 때문에 몽골에서의 지방질은 부(富)의 상징이 된다.

# 주(住)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의 주민의 약 42%가 게르에서 살고 있고 국토의 대부분을 차지 하는 시골의 초원지대에는 거의 대부분이 게르에서 살고 있다. 현대식 아파트는 1960년대부터 건설되기 시작하였으며 몽골인의 아파트 거주율은 49.1% 수준이다. 그리고 도시외곽이나 아이막의 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게링아일이 있다. 게르 호로를은 나무판자로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 나무로 집을 짓거나 게르를 설해 놓은 집이다.
· 게르(몽골 전통 집)
몽골은 유목민족으로서 유목생활 형태에 맞추어 주거도 이동하기에 편리한 천막집을 주된 주거형태로 사용해 왔는데, 나무와 양털을 주된 재료로 조립되는 이러한 형태의 가옥을 게르(Ger)라고 부른다. 게르는 몽골고원의 풍토와 이동을 기본으로 하는 유목생활에 편리한 구조로 만들어졌다. 그래서 게르의 구조는 여러 가지로 유목생활에 적합하게 꾸며져 있다.
유목생활에 걸맞게 이동도 간편하다고 볼 수 있는데 몇 사람이 신속하게 조립, 해체가 가능하고 게르부품을 싣고 운반하는 작업도 매우 간단하다. 게르 안에 있을 때도 늘 밖에 있는 가축떼의 동정을 파악하고 이리나 외적의 습격에 민첩하게 대응할 수 있다.
· 게르 호로를(울타리 집)
수도 울란바타르와 같은 대도시 외곽이나 아이막의 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형태로 나무판자를 울타리(하샤)로 하고 그 안에 나무로 지은 집을 짓거나 마당에 게르를 설치해 놓은 집의 형태를 '게르 호로를'이라고 한다.
나무로 만든 집들도 거의 비슷하나 이들은 나무나 땔감으로 난방을 하는데 더워진 물들이 방마다 설치된 파이프를 통해 열을 전달하게 되지만 혹독한 몽골의 추위를 이기기엔 너무나도 미약하다. 대게 화장실은 바깥마당에 놓여있는 것이 일반 아파트와 다르다.
· 어런소츠(아파트)
아파트는 보통 2칸, 3칸, 4칸 등으로 구분되는데, 대게 응접실도 방수에 포함시킨다. 즉. 2칸짜리 아파트는 방 하나에 응집실이 하나인 아파트를 의미하는 것이다. 방에는 항상 침대가 있으며 응접실에는 소파가 있다. 마루건 방이건 간에 항상 커다란 카페트가 깔려있는데 이는 추위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다. 아파트는 보통 외벽이 30cm가 넘는 두꺼운 콘크리트로 지어져 있는데 이는 공산주의 시절 지어진 탓에 단단하게 잘 지어진 편이며 추운 겨울을 대비하여 창문도 2중으로 되어 있다.
응접실과 모든 방에는 '파르'라고 하는 보일러가 있는데 이는 겨울에 정부에서 공급해 준다. 즉, 개인들이 난방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울란바타르시의 화력발전소에서 동시에 공급해 주는데, 연료사정이 좋지 않아 혹독한 추위를 견디기에는 그 열이 너무 미약해서 대게 잠을 잘 때는 두꺼운 옷을 껴입고 자야 한다.

# 몽골음악(音樂)
옛날부터 몽골인 사이에서 전해지고 있는 고유의 음악 외에 중세에 다른 민족에게서 이입된 악기나 음악도 많으며 또 오늘날 몽골지방이라고 불리는 지역에 침입 거주한 민족, 예컨대 위구르족 등의 음악 등도 이에 포함된다. 현재 몽골은 몽골공화국에 속하는 외몽골과 중국에 속하는 내몽골로 나누어져 있으며, 둘 다 공통적으로 고유의 몽골음악을 가지고 있는데 일반적으로 외몽골 지방은 이란이나 아라비아 등의 영향을 많이 받고 내몽골 지방은 근대 중국(明·淸)의 속악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다. 그밖에 원(元) 이후에는 티베트 전래의 라마교 음악이 종교음악으로 불리고 있으나 이들은 라마사원에서만 쓰이고 있으며 일반의 민속음악에는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 가요
고유의 몽골음악에서는 노래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 근대 음악은 노래에 몽골 특유의 마두금(馬頭琴)이나 호금(胡琴), 피리 등의 반주가 따른다. 몽골의 노래는 속요풍의 노래, 오락의 노래, 의식 등의 노래로 나누어진다. 속요풍의 노래로는 목양(牧羊)의 노래 등이있고, 오락의 노래로는 씨름 응원의 노래 등이 있으며, 의식의 노래로는 성 칭기스항의 노래 등이 있다. 일반적으로 가요의 음계는 5음 음계가 주가되고 있으나 의식의 노래 등에는 7음 음계도 쓰인다.
· 악기
고대에는 몽골특유의 악기로서 호가(胡茄: 피리의 일종)나 호각(胡角: 뿔피리의 일종)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다. 현재 사용되고 있는 악기는 대부분 근대의 외부 민족에게서 전래된 것으로 이것을 바탕으로 해서 개조된 것이다. 오늘날 몽골특유의 악기로 인정되고 있는 마두금도 아라비아의 라바브를 본떠서 개조한 것이다. 그밖에 호금이라고 하는 호궁(胡弓)의 일종이 사용되는데, 이것은 중국의 호궁과는 달리 거란의 해금에서 변화된 것이다. 원대에는 널리 이란·아라비아·티베트 등의 악기도 들어오고, 또 명나라 때와 청나라 때는 중국의 속악기도 많이 수입되어 기악합주도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 악기로는 12현의 쟁(箏), 중국의 3현(三絃), 운라(雲), 동각(銅角), 소납, 피리, 북, 통소, 양금(洋琴) 등이 있다. 이 기악합주에는 근대 명·청 음악풍의 선율이 주로 연주되고 있다.

# 몽골문학(文學)
몽골문학은 1921년의 혁명을 기점(基點)으로 하여 전·후기로서 크게 나눌 수 있다. 혁명전의 문학은 13세기의 영웅서사시적 연대기 '원조비사'로 시작하여 그 후 전래된 불교문화의 영향에서 나온 '몽고원류'(蒙古源流), '아르탄 토프치', '보물염주', '청사(靑史)' 등의 연대기와 '설해(設海)', '현우경(賢愚經)', '비유경(譬喩經)', '마법시체전', '판찬탄트라 이야기' 등의 불교문학이 중심이 된다. 그밖에 유목민들 사이에 대대로 전래된 신화·영웅시·가요·속담·수수께끼 등 다양한 대중문예가 있어 혁명 후의 문학에 풍부한 자료를 제공했다.
1921년의 혁명에 의해서 그때까지 수세기에 걸쳐 몽골민족을 지배해왔던 봉건문화와 불교문화는 쇠퇴하고, 새로운 체제하에서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문학이 대두했다.
훌륭한 구승문화의 유산으로 배양된 시가 분야는 혁명과 동시에 '캬프타의 노래', '붉은 깃발' 등의 가요시를 낳아 새로운 시대의 여명기를 맞았으나, 산문분야는 수년간의 태동기를 거쳤다. 그러나 1920년대의 스프바토르 클럽, 잡지 '혁명청년동맹' 등의 적극적인 문예활동과 새로운 문학의 모색에 힘입어 최초의 문예선집을 출판하였고, 또 현대몽골소설의 기념비적 작품이라고도 할 수 있는 T. 담딘슬렌의 장편 '버려진 딸'(1929)을 낳았다. 1930년대에 들어와서 단편소설이 연이어 발표되었다.
이 시기(1921∼1940)는 문학사상 반제국주의·반봉건주의 항쟁과 인민혁명의 승리 및 비자본주의 발전의 길을 걸은 시대로서 명확하게 구분된다. 제2차 세계대전 전후에 걸쳐 몽골문학은 비약적인 발전을 했다. 즉, 국내의 정치·경제·문화의 급속한 향상과 안정에 힘입어 많은 작가가 배출되었다. 문예지 '광휘'(1944)의 발간을 위시하여 여러 작가의 선집 출판, 장편소설의 탄생, 희곡의 자주전환 등, 몽골문학은 혁명 후 20년이 지나 개화기를 맞이하였다.
전시에는 많은 작가가 작품을 통해서 소련과의 연대강화를 호소하고, 인민대중의 창조적 활동의 환기에 공헌하였다. 또 전후에는 평화와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문학으로서 그 위치를 굳혔으며, 인민혁명당 중앙위원회의 사상의식문제에 관한 많은 결의(1947)와 제1차 작가대표자회의(1948)의 결의는 사회주의체제 하에서의 몽골문학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여 주었다. 사회·경제·문화 등 여러 방면의 변혁과 성과를 저작활동의 중심이념으로 하고 있으나, 최근에는 주제가 확대·심화되어 일상생활의 단면이 많이 등장하여 새로운 전기를 맞고 있다.
▒ 원조비사 ▒
성립연대는 13세기 중기(1257년 이후)이고, 저자는 알 수 없다. 처음에는 위구르식의 몽골글자로 쓰여졌으나, 1380년대 명나라 초기에 한자로 음역되고 각 권으로 나누어 졌다. 즉 각 단어 오른쪽에 중국어로 의미를 풀어놓고 각 절마다 그 끝에 중국어 번역문이 덧붙여졌다. 책이름도 이때 붙여졌다.
북아시아 유목민족에 의해 편찬된 역사서로서는 최고(最古)로 내용은 몽골족과 칭기즈 항의 선조에 대한 전승·계보, 칭기즈 항의 일생과 태종의 치세를 기록한 것으로 몽골제국 성립시기 및 초기의 역사에 대한 중요한 사료이다.
또한 몽골족이 서사시적인 수법을 많이 사용하여 그들이 언어로 기록한 문헌이므로 문학서와 중세 몽골어의 연구자료로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