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재밋는몽골이야기

제1장 유라시아 초원의 세계(최초의 통일시도)

몽골승마클럽 2007. 1. 13. 14:42

제1장 유라시아 초원의 세계
최초의 통일시도

전설/ 시조 카이두/ 카불칸/ 금과의 대립/ 타타르의 몽골격파/ 몽골의 사회적 혼란/ 에수게이-바아토르/분열시기의 칸위 지향 세력들/ 자무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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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

전설에 의하면 몽골족의 선조는 하늘의 명에따라 태어난 초원의 강자인 잿빛 푸른이리 수컷과 아름답고 순한 새하얀 사슴 암컷이었다. 이 이리와 사슴이 바이칼 호수를 건너와 오논강의 발원지 부르칸산의 목초지에 왔을 때 바다치칸이란 새끼를 낳았다. 여기서 호수를 건넜다는 것은 몽골국이 새로운 단계로 들어섰다는 뜻으로 시베리아 타이가와 스텝초원 요소의 정신적인 결합을 나타낸다. 바다치칸의 아들은 타마차, 그의 아들은 고리찰, 그의 아들은 아우잔, 그의 아들은 사리카차우, 이하 에케니돈, 셈소치, 카르추, 보르지기타이, 토로골진으로 이어진다. 토로골진의 두 아들중 동생 도분-메르겐은 옮기가는 유목처녀 알랑-고아와 결혼하여 2명의 아들을 두었다. 도분-메르겐이 죽은 후에도 알랑-고아는 계속하여 3명의 아들을 낳았다. 즉, 알랑-고아는 빛에 의하여 니룬-몽골인의 선조들을 낳았는데 이중 막내 보돈찰이 보르지긴계 키야트가문의 시조가 되었으며 칭기스칸은 그의 10대손이었다.

보돈찰은 알랑-고아의 남편인 도분-메르겐이 죽고 나서 태어났으므로, 도분-메르겐의 아들들은 보돈차르가 사생아일 것으로 의심하였다. 그러자 어머니 알랑-고아는 어느날 아들들을 불러 남편의 사후 세 아들이 태어난 이유를 설명하였다. 모전천막의 공기 흡입구에서 들어온 빛이 자신의 배속을 비춰 임신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전설은 이리와 사슴의 남자계통이 도분-메르겐에서 단절되고 칭기스칸의 선조인 보돈찰은 빛의 아들로 되어있다. 즉, 동물을 선조로 하는 전설과 빛에 감응된 전설이 결합된 것이다.

보돈찰은 모양이 특이하고 말이없어 바보취급 당했으나 어머니 알랑-고아만은 그가 뒤에 고귀한 자가 될 것이라고 하였다. 칭기스칸의 조상이 보통사람과는 다르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알랑-고아의 사후, 자식들은 유산인 가축과 식량을 나누었으나 막내인 보돈찰은 바보라서 아무 것도 주지 않았다. 외톨이 보돈찰은 비루먹은 조랑말을 타고 오논강을 내려가 풀집에서 살았다. 그곳에서 말 꼬리털로 덫을 만들어 매를 잡아 길렀으며, 늑대무리가 낭떠러지로 몰아넣은 들짐승을 살며시 다가가 잡아먹었다. 봄이 되어 오리나 거위가 건너오자 보돈찰은 매사냥으로 먹이를 구하였다. 이때 한 무리의 사람이 옮겨왔다. 보돈찰은 그 사람들과 어울려 낮에는 말젖을 발효시킨 술을 마시고 밤에는 풀집으로 돌아와 잤다. 어느날 형인 부구-하다기는 동생인 보돈찰이 궁금하여 오논강을 내려와 그를 데리고 돌아갔다. 보돈찰은 그곳(톤게리크 천)의 사람들은 위아래가 없고 주인도 없으니 이들을 약탈하자 하였다. 이리하여 형제 5명이 이들을 습격하여 말과 식량을 손에 넣고 사람을 부리면서 생활하게 되었다. 이 이야기는 처음에는 가난한 수렵민이었던 칭기스칸의 조상이 유목민을 습격하여 사람과 가축을 손에 넣어 생활한 것을 말하고있다.

보돈찰은 임신한 다른 부족의 여성을 잡아 처로 삼았다. 이 처와 보돈찰의 사이에 낳은 아들이 카비치-바아토르, 그의 아들은 메넨-토돈이었다. 그런대로 구색을 갖추고 오논강 일대로 뻗어나간 보돈찰계의 보르지긴씨족은 메넨-토돈에 이르러 누스-에르기와 코키-시야크 지방을 중심으로 세력을 키워갔다. 메넨-토돈과 처 모노룬에게는 7명의 자식이 있었다. 그러나 케룰렌강 부근은 잘라이르족을 위시한 많은 몽골유목민이 살고 있었으며 키타이에 너무 가까웠다. 잘라이르부가 키타이(요)군에 쫓겨오자 보르지긴씨족은 잘라이르부에 밀려 바이칼호 동부의 바르코트 지방까지 물러나야했다. 이 와중에서 메넨-토돈의 처 모노룬은 수많은 가축을 치는 재력가였으나 그녀와 7명의 아들들은 사망하였고, 막내 나친-바아토르는 마침 다른 곳에 있어 난을 면하였으며 큰아들 카치쿨크의 아들 카이두는 어린이라 숨겨져 구출되었다.

나친-바아토르는 뺏앗긴 말중 한 마리가 도망쳐 온 것을 타고 잘라이르족으로 향하였다. 도중에 아버지와 아들이 매사냥을 하고있는 곳에 이르렀는데 그 매는 형들의 것이었다. 길이 꼬부라져 아버지의 모습이 시계에서 사라지자 나친-바아토르는 이 아들을 죽이고 그의 아버지를 처치하여 말과 매를 빼앗았다. 이후 계속 전진하자 어린이 말치기 몇 명이 수백마리의 말을 지키고 있었다. 이 말들이 빼앗긴 자기 말떼임을 안 나친-바아토르는 높은 곳에 올라가 오는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후 이들을 모두 죽이고 말을 몰아왔다. 나친-바아토르의 가계는 우르우트씨, 망구트씨로 후에 칭기스칸을 잘 섬겼다.

시조 카이두

그뒤 카이두는 작은 아버지 나친-바아토르의 도움을 받아 사람들을 규합하여 1021년 오논강 동부의 잘라이르부를 격파하고 다시 이 일대로 나옴으로서 새로운 세력으로 떠올랐다. 그가 두각을 나타내자, 사방에서 그의 밑에 들어오는 부족민이 많아지게 되었다. 카이두는 칭기스칸의 6대 할아버지였다.

12세기초 키타이(요)제국이 여진(금나라)에 무너졌다. 금나라는 남방으로 세력을 뻗쳐 화북을 점령하였으나 북방으로는 내몽골을 지배하는데 그쳐 다른 부족의 지배를 벗어난 몽골고원의 유목민들은 몽골울루스를 세우고 칭기스칸의 증조부 카불 칸, 그의 육촌인 암바카이 칸, 카불 칸의 아들 쿠툴라 칸이 대를 이었다. 그러나 이때의 몽골인들은 수많은 독립부족(울루스)으로 나뉘어 서로 싸웠다. 초원의 유목민사이에 원한관계는 끊임없이 계속되는 경우가 많았다. 더욱 금나라는 씨족과 씨족, 부족과 부족을 대립시키는 정책을 취하여 몽골민족은 피로써 피를 씻는 항쟁을 계속하였다.

카불칸

오논강 일대에서 기반을 잡은 카이두의 후손들은 계속 주변부족들을 정벌해 나갔다. 그리고 키타이와 금나라가 바뀌는 때 본격적으로 몽골고원에 자리를 잡았다. 카이두의 후손들은 여러 씨족을 만들었는데 이중 카이두의 둘째아들인 차라카이-링코가 세운 치노스씨족(타이치우드씨족)과 카이두의 손자 카불칸이 세운 키야트씨족이주요 씨족이 되었다. 차라카이-링코의 큰아들이 셍굼-빌게이며 셍굼-빌게는 암바카이칸이란 아들을 두었다. 셍굼-빌게는 카불칸의 아버지인 톰비나이-세첸과 1089년 정치적 연합을 맺었다. 강력한 이 두 씨족은 금나라 초인 1130년 이들의 아들들인 카불칸과 암바카이칸에 의하여 몽골 울루스라는 독립세력을 만들었다. 톰비나이-세첸은 두 명의 처가 있었으며, 한 처로부터는 다섯 명의 아들을, 또 한 처로부터는 네 명의 아들을 두었다. 카불칸은 두번째 처에서 태어난 첫째 아들로 그 출생순위는 여섯 번째였다. 그는 키야트씨족을 세워 암바카이칸의 타이치우드씨족과 연합을 맺고 연장자로서 먼저 1대 칸에 즉위하였다.

이 몽골 울루스에는 보르지긴씨족 이외에 에르군네강과 케룰렌호 일대에 퍼져있는 다른 몽골계 씨족도 포함되었으며 카불칸의 통치기에는 세력이 더욱 커져 모든 몽골인을 지배하게 되었다. 이런 중 카불칸의 처 카라-리코의 동생인 콩기라트씨족 사인-테긴이 병에 걸려 타타르부의 차르길-노도이라는 샤먼을 불렀지만 그는 죽고 말았다. 이에 그의 형제들이 그 샤먼을 죽였다. 죽은 사인-테긴과 카불칸의 아들들은 안다(의형제)와 코다(인족)관계였으므로 1130년 자연히 타타르부와 싸우게 되었다.

금과의 대립

한편 알탄칸 (금의 황제) 희종은 1135년 즉위식에 신하로서 카불칸을 초대하여 그에게 진수성찬을 차려 주었다. 카불칸은 금나라 사람들이 교활하여 몰래 음식물에 독을 타지 않았는지 의심하였다. 그는 바람을 쐰다는 핑계로 가끔 밖에서 물속에 들어가 더위를 식히는 척하면서 먹은 음식물을 전부 토해낸 후 돌아와 많은 음식과 술을 계속 먹었다. 그는 알탄칸 앞으로 나가 박수를 치며 춤을 추고 알탄칸의 수염을 잡고 희롱하기도 하였다. 이에 대신들이 카불칸을 묶으려 하였으나 알탄칸은 카불칸의 거동은 술이 취한 우의의 표시로 이해하고 그를 용서한 후 많은 금과 보석 및 의복을 하사하였다.

그러나 이 일에 분개한 대신들은 돌아가는 카불칸을 잡아오려고 기마병을 보냈으나 카불칸은 뺑소니를 쳤다. 이들은 그를 계속 추적하여 동료들과 노는 그를 잡았다. 그의 안다인 살지우다이는 일을 눈치채고 아주 빠른 백색 숫말을 그에게 주자 그는 그 말을 타고 재빨리 도망쳐 집으로 온 후 며느리와 노비들을 불러 뒤쫓아온 그들을 모두 죽여 위기를 벗어났다. 이후부터 금나라와 몽골 사이에는 전쟁이 시작되었다.

1139년 금나라의 몽골원정군은 보급문제로 퇴각하게 되었다. 그러자, 몽골군은 이들을 뒤쫓아 큰 타격을 입혔다. 1143년 금나라 노국왕의 아들이 아버지의 처형에 앙심을 품고 몽골과 연합하여 20여 개의 성채를 함락시키자 금나라는 8만 명의 군대를 보내 몽골을 쳤으나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알탄칸은 화의를 맺을 수밖에 없어 27개의 성채를 넘겨주고 매년 소, 양, 쌀, 콩 등 많은 양의 공물을 준 후 몽골의 수령에게는 국왕의 칭호를 주었다.

1150년 카불칸은 세상을 떠나고 싸움은 2대 칸인 타이치우드씨의 암바카이에게 인계되었다. 카불칸에게는 일곱 아들이 있었지만 몽골 울루스의 계승형태는 윤번제로 암바카이칸에게 칸위가 돌아갔던 것이다. 암바카이칸은 칸위를 계승한 후 타타르부를 앞세운 금나라의 노골적인 대몽골 간섭을 막아야 했다.

군사적인 방법으로 아무 것도 이룰수 없게된 금나라는 몽골고원의 각 부족들간에 경쟁심과 적대감을 불어 넣었다. 암바카이가 칸으로 선출된 후 그는 타타르인에게 딸을 혼인시켜 데려가는 도중 다른 타타르씨족에게 체포되어 금나라로 인계되었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수행하기도 전에 금나라의 그물에 걸려든 것이다. 암바카이칸은 압송되기 전 베수트씨 발라카치를 통해 후계 칸으로 쿠툴라와 카다안-타이시를 지명하였다. 이와함께 "새로운 칸은 딸을 데리고 시집보내러 가는 것을 아주 조심하라. 나는 타타르인에게 잡혔다. 너희들은 다섯 손가락의 손톱이 모두 닳아 없어질 때까지, 열 개의 손가락이 모두 마모될 때까지 이 원한을 갚아다오." 라고 하였다. 이는 타타르와 가장 잘 싸울수 있는 사람을 새로운 칸으로 택하라는 말이었다. 이러한 동시지명방식은 타타르와의 싸움이 여의치 못할 경우 칸이 되지못한 세력이 이탈할 수 있었다. 암바카이칸은 금나라에서 목판에 못 박히는 수치스런 죽음을 당하였다.

타타르의 몽골격파

카불칸의 아들 쿠툴라와 암바카이칸의 아들 카다안-타이시 후보가 확정되자 보르지긴계의 족장 및 여러 노얀들은 오논강변의 코르코낙-주부르에 모여 키야트씨족의 쿠툴라를 칸으로 선출하고 암바카이칸의 복수를 위하여 새로운 칸에게 모든 군대를 통괄하게 하였다. 모임이 끝나자, 몽골인들은 코르코낙-주부르의 신령스런 나무 주위를 돌면서 땅이 파헤쳐질 정도로 춤을 추었다.

쿠툴라는 거인이었다. 쿠툴라의 음성은 산속의 벼락처럼 울렸으며, 손은 곰의 발 같아서 화살을 꺾듯이 사람을 꺾어 두 동강을 낼 수 있었다. 쿠툴라는 겨울에 큰 나무들을 쌓아올린 불 옆에서 벌거벗은 채로 잤는데 자기 몸에 불똥이 튀거나 타고 있는 나무조각이 떨어져도 느끼지 못하였고, 잠에서 깨면 불에 데인 상처를 벌레 물린 자리로 알았다. 그는 끼니마다 3년 된 양 한 마리와 아주 큰 사발로 술을 먹는데도 배부른 적이 없었다.

쿠툴라는 칸위를 계승한 후 타이치우드씨족의 카다안-타이시와 함께 타타르부로 진군하여 커턴-바라카와 잘리-부카 두 족장이 이끄는 타타르군과 13번이나 싸웠으나 이 복수전은 여의치 못하였다. 이에 몽골부는 메르키트부의 도움을 바랐으나 거절당하였다. 화가난 몽골부의 쿠툴라칸, 아리크-치노, 카다안-타이시는 3군을 이끌고 이제는 메르키트부를 공격하였다. 메르키트부와도 적대관계로 된 몽골부는 지도부사이에 틈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쿠툴라칸이 타타르전에서 이기지 못하자 여러 노얀들에 대한 장악력이 약화되었던 것이다.

칸권의 쇠퇴는 먼저 비보르지긴계 씨족들 특히 알치-타타르씨족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되르벤 씨족에서 일어났다. 되르벤씨족은 쿠툴라칸이 경무장을 한 채 사냥을 나가는 것을 노상에서 습격하기도 하였다. 또 토오릴이 케레이트부에서 쫓겨나자 쿠툴라칸 밑의 노얀인 에수게이-바아토르는 독자적으로 토오릴과 안다를 맺고 그를 복권시켜 주었다. 이렇게 같은 키야트계인 에수게이-바아토르의 행동도 막지 못할 정도로 칸권은 약화되었다.

1161년 타타르는 금나라의 사주와 지원으로 몽골족을 급습하여 부유르호 근처에서 결정타를 날리자, 몽골울루스는 자체 분열과 상쟁이 잇달았다. 이런 분열은 몽골 지도부가 키야트씨, 타이치우드씨의 대등한 두 씨족이 칸을 선출한다는 윤번제의 한계 때문이었다. 타타르전 이후 쿠툴라칸의 권위에 불복하는 여러 노얀들이 우후죽순처럼 등장하자, 이러한 약점이 그대로 노출되어 몽골울루스는 후계 칸을 선출하지 못하고 무너진 것이다. 몽골의 붕괴로 쿠툴라의 아들인 조치와 알탄은 칸의 칭호를 갖지 못하였고 몽골인들은 예전의 부족, 씨족, 하위씨족 체제로 되돌아갔다.

몽골의 사회적 혼란

울루스의 와해 후, 몽골울루스의 지배층인 타이치우드씨족, 키야트씨족의 여러 노얀들과 그 후예들은 서로 싸우기 시작하였으며 다른 씨족의 족장들도 이 싸움에 뛰어들었다. 결국 몽골의 정치, 사회, 경제적인 몰락으로 분열과 분쟁이 일상화되었다. 아무런 수령도 군주도 없이 부족들은 하나씩 혹은 둘씩 떨어져 살게 되었으며 끊임없는 약탈과 복수로 씨족집단은 동질성을 잃고, 패배한 씨족과 부족은 정복집단에 분배되었다. 이제 금나라는 그들에게 수시로 공물을 요구하였고, 그들은 개나 쥐를 잡아먹고, 그 가죽으로 옷을 해 입어야만 했다. 막강한 수령의 징표는 쇠로 된 의자를 가지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전통적인 몽골사회의 파탄은 마지막 기반인 도덕성과 윤리관을 마멸시켜 아들이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고 동생은 형의 말에 주의하지 않으며, 남편은 부인을 믿지 못하고 부인은 남편의 지시에 따르지 않으며, 시아버지가 며느리를 칭찬하지 않고 며느리는 시아버지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으며, 어른이 아이를 보호하지 않고 아이는 어른의 지시에 따르지 않는 사회가 되었다. 그러한 민족에게는 도둑과 거짓말쟁이, 불량배와 무위도식 자들이 많아지고 도적질과 폭력, 그리고 부도덕함과 타락이 남자다움과 우월함의 표시로 생각되었다.

이러한 전시상태는 몽골인 들의 경제에도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가축들은 약탈, 도살되고 말들은 죽어 초원에서 썩어갔다. 젊은이들은 생존의 활로를 찾아 자신의 씨족을 떠나 주인을 찾아 다녔다. 그렇게 함으로써 전투능력에 따라 많은 전리품을 얻을 수 있었고 급속한 신분 상승이 가능하였다. 몽골울루스 와해후 집단적 대항기능을 상실한 몽골부는 외부세력에 아주 취약하였다.

에수게이-바아토르

에수게이-바아토르는 카불칸의 둘째아들인 바르탄-바아토르의 셋째아들로서, 쿠툴라칸이 이끌었던 타타르전에서 무공을 떨쳤다. 에수게이-바아토르는 키야트씨의 라이벌이었던 타이치우드씨의 몇몇 노얀들과 동맹을 맺고 있었다. 이중 탈구타이-키릴툭이나 터더엔-기르테와는 유목을 같이할 정도로 친하였으나 정작 그의 씨족인 키야트씨 노얀들과는 사이가 멀었다. 그 결과 후에 그가 죽고 그의 아들 테무진이 타이치우드씨족 노얀들에게 괴로움을 당할 때 키야트씨족은 일체 모르는 체 하였다. 아무튼 그는 이러한 지지기반을 발판으로 케레이트부의 칸인 토오릴을 구원해 주고 안다관계를 맺는 등 사방으로 자기의 영향력을 심는 데 노력하였다. 이 안다결맹은 그 자신의 세확장 뿐만 아니라, 이후 테무진의 등장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는 세력을 확장한 끝에, 키야트-보르지긴이라는 독립된 씨족을 만들었다.

이전에 에수게이-바아토르는 오논강에 매사냥을 갔는데 메르키트부의 에케-칠레두가 콩기라트부 올쿠누트씨의 아가씨를 색시로 삼아 마차로 데려오는 것과 마주쳤다. 급히 집으로 돌아온 그는 형 네쿤-타이시(태사)와 동생 다리타이-옷치긴(막내)와 함께 칠레두와 신부를 추격하였다. 약탈혼을 하려는 것이었다. 칠레두는 말에 박차를 가하여 도망가고 세 사람은 그를 추격하였다. 칠레두는 산을 한바퀴 돌아 원래의 곳으로 돌아오자 신부가 말했다. "그 세사람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당신의 목숨을 노리고 있는 얼굴이었습니다. 당신의 목숨이 있는 한 여자는 몇 명이라도 거느릴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호엘룬이란 내 이름을 붙여 주십시오. 부디 목숨을 크게 생각하시고 내 옷을 가지고 가십시오." 이렇게 말하고 호엘룬은 자신이 입고있던 속옷을 벗어주자마자 3명이 산을 돌아 추격하여 왔다. 칠레두는 말에 채찍을 가하여 쏜살같이 오논강 상류로 도망쳐 버렸다. 3명은 언덕을 7개 넘을때까지 추격하다 돌아와 호엘룬이 탄 마차를 끌고 돌아왔다. 호엘룬은 큰소리로 울면서 끌려가 에수게이의 처로 되었다.

에수게이와 결혼한 호엘룬은 테무진을 위시하여 카사르, 카치운, 테무게-옷치긴의 4명의 아들과 테무룬이란 여자아이를 낳았다. 이후 에수게이-바아토르는 큰아들 테무진을 보스카올씨의 족장 데이-세첸의 딸 보르테와 결혼시킴으로써 대권장악의 길을 착실히 구축해가던 중 어느날 돌연히 타타르인들에게 독살되었다. 이러자 그가 구축했던 키야트-보르지긴씨족에 예속된 백성들은 타이치우드씨의 타르구타이-키릴툭에게 흡수되고 그의 가족들은 공동생활에서 추방되었다. 에수게이-바아토르의 죽음은 각 노얀들의 이합집산을 한층 심화시켰고 대권의 향방을 더욱 어지럽게 만들었다.

분열시기의 칸위 지향 세력들

에수게이-바아토르 사후 몽골부는 타이치우드씨나 키야트씨 및 여타 유력 씨족의 노얀들로 흩어져 있었다. 이들 세력은 크게 보르지긴계와 비보르지긴계 세력으로 나눌수 있었는데 보르지긴계는 타이치우드씨의 탈구타이-키릴툭, 터더엔-기르테, 토오릴, 조치-칸, 바가지, 코릴-바아토르, 아오초-바아토르, 줄레, 카치운-베키, 우두르-바얀, 코돈-오르창, 쿠도오다르-베키가 있었으며 키야트씨에는 사차-베키와 타이추, 창시우트, 쿠차르-베키, 조치, 알탄, 예케-체렌, 다리타이-옷치긴 등이 서로 대립하고 있었다. 비보르지긴계는 주로 자다란, 되르벤, 카다긴, 살지우트, 콩기라트씨의 족장들이 세력을 이루고 있었다.

당시 몽골부는 이러한 군웅할거로 말미암아, 사회, 경제적으로 적지않은 변화가 일어났다. 즉 각 세력간에 우위를 차지하려는 시도가 가시화 됨에 따라 각 노얀들은 출신성분에 상관없이 자기에게 충성하는 너케르 집단을 끌어들였다. 또 적의 빈번한 공격에 집단적으로 방어하기 위하여, 느슨한 유목형태가 쿠리엥식으로 바뀌어서, 항상 전투태세를 취하게 되었다.

자다라다이(자다란씨족의 조상)의 아들은 투구데이이며 그의 아들은 부리-볼치로였다. 부리-볼치로의 아들은 카라-카다안이며 그의 아들이 자무카로서 그는 어린시절에 테무진과의 안다 관계를 맺었다. 그때 자무카는 고라니의 복숭아뼈를 테무진에게 주었고, 테무진은 낚시 바늘처럼 꼬부라진 복숭아뼈를 자무카에게 주면서 안다라고 불렀다. 그 다음해의 봄에 알랑기르궁을 가지고 놀때, 자무카는 2살난 소의 두 뿔을 붙인 후 구멍을 뚫어 만든 소리나는 화살을 테무진에게 주었고, 테무진은 두송으로 만들어진 날카로운 촉을 가진 고도리화살을 자무카에게 주었다. 위의 안다서약은 테무진이 데이-세첸가에 데릴사위로 가 있었을 때 맺은 것이었다. 자다란씨 족장의 아들인 자무카와 몽골부의 큰 세력이었던 에수게이-바아토르의 아들이며, 보스카올씨의 족장인 데이-세첸의 데릴사위인 테무진이 정치적 동맹과도 같은 안다를 맺었다는 것은 이들의 야망이 만만치 않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두사람의 만남과 경쟁은 몽골고원의 통일을 가속화시켰다.

자무카

에수게이-바아토르의 죽음으로 서로 헤어진 후 메르키트부는 자무카를 공격하여 그가 가진 모든 재산을 빼앗았다. 그는 30명의 너케르와 한동안 유랑하다가 메르키트부의 족장 톡토아-베키에게 귀순하였다. 자무카는 늘 톡토아-베키와 노얀들에게 아첨의 말을 하였다. 어느날 그는 한 마리의 수리가 풀숲에서 새끼를 부화하는 것을 보고 그곳에다 표시를 해 놓았다. 다음날 그는 몇몇 노얀들과 함께 이곳에 와서 작년에 내가 이곳을 지날 때, 한 마리의 수리가 저 수풀 속에 집을 짓고있는 것을 보았다. 그 새가 지금도 저곳에 집을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새끼들이 있는지를 가서 보겠다고 한 후 그가 가까이 가자 한 마리의 수리가 수풀위로 날아올라 갔으며 그 수풀에는 새끼들이 있었다. 노얀들은 "작년에 본 곳을 올해까지 정확히 기억하다니 아주 놀랍다"고 말하였다. 자무카는 이러한 방법으로 톡토아-베키 및 많은 메르키트 노얀들에게 신임을 쌓아 자기의 지위를 높여 나갔다.

그는 톡토아-베키가 날이 밝아도 곧바로 일어나지 않고 또 그의 호위병들도 그 시각에는 경계를 아주 소홀히 하는 것을 안 뒤, 어느날 새벽 자기의 너케르 30명을 데리고 톡토아-베키의 천막에 들어갔다. 톡토아-베키의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으므로 그는 이들이 자기를 살해할 수 있다고 보았다. 자무카는 호위병들이 정성으로 그를 잘 경호하는지 보기위해 들어왔다고 핑계를 댔지만 그의 뜻을 짐작하고 톡토아-베키는 금잔에 말젖술을 따라 땅에다 뿌리면서 이렇게 맹세하였다. "나는 너의 전 씨족과 재산을 돌려주겠다. 오늘부터 나는 너에게 나쁜 짓을 절대 하지 않겠다."

이렇게 메르키트부에서 독립한 자무카는 몽골부의 대표세력으로 떠올랐다. 그가 구축한 세력은 데렌기와 코리다이 무리, 사차-베키와 타이추 무리(키야트-주르킨씨), 에케-체렌 무리, 카다안과 터더엔-옷치긴 무리, 창시우트 무리(키야트-창시우트씨), 다리타이-옷치긴 무리, 쿠차르-베키 무리, 조치-칸 무리(키야트-우에게트씨), 알탄 무리(키야트-우에게트씨) 등 범 키야트씨 계와, 보다아트씨, 엉구르의 바야우트씨, 아다르긴씨, 자다란씨, 게니게스씨, 바룰라스씨, 이키레스씨, 우루우트씨, 망구트씨, 노야킨씨, 바아린씨, 코롤라스씨, 치노스(네구스)씨 등이었다. 즉 타이치우드씨와 라이벌 관계에 있는 범 키야트씨 대부분이 자무카를 따랐으며 타이치우드씨 중 치노스씨, 우르우트씨, 망구트씨가 자무카 측에 가담하였다.

자무카는 이들과 자다란씨족과 가까운 씨족들을 지지기반으로 1180년 초 케레이트부의 토오릴과 형제처럼 지냈다. 즉, 몽골부는 분열되었지만, 아직도 막강한 힘을 보유하고 있는 타이치우드씨계와, 키야트씨계와 연합한 자무카계, 그리고 케룰렌 호 주변의 되르벤씨, 카타긴씨, 살지우트씨, 그리고 콩기라트씨 등으로 나뉘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