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재밋는몽골이야기

제1장 유라시아 초원의 세계(몽골의 유목사회)

몽골승마클럽 2007. 1. 13. 14:40

제1장 유라시아 초원의 세계
몽골의 유목사회

자연인/ 혈족과 안다(의형제)그리고 너케르/ 칸(족장)/ 여성의 지위/ 몽골인의 신앙/약탈교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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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인

오늘날과 같이 어느 정도의 집단적 정착 목축이 뿌리 내리기 이전, 몽골고원의 유목민들은 평원의 목초지에서 여름을 지내고, 바람과 추위가 덜한 계곡에서 겨울을 나는 일을 되풀이하였다. 몽골초원은 산이 많은 토지로서 강우량이 아주 적어 농업을 할 수 없다. 또한 표토층이 얇아 흙을 갈아엎으면 겨울의 맹렬한 북풍에 금새 날려가 사막화됨으로 자연환경에 적응한 목축만이 유일한 삶의 방식이었다. 그 목축도 풀이 드문드문 자라서 가축떼가 한곳의 풀을 뜯어먹고나면 물과 풀이 있는 다른 곳을 찾아 이동하여야 했다. 유목민들은 각각 무리로 나뉘어 친숙한 길을 따라 보통 150 km 정도의 거리로 계절 이동을 하였다. 이들은 언제 어디로 가서 어떠한 것을 먹고 생활하면 좋은지를 잘 아는 대자연의 움직임에 밀착한 생활을 하였으므로 어지간한 역경도 잘 참고지낼 수 있었다. 즉, 이들은 자연상태로 생활할 수 있었다.

어린이는 양에 올라타고 활을 당겨 새나 쥐를 잡았으며 조금 성장하면 여우나 토끼를 잡아먹었다. 장정으로 활을 당길 수 있는 자는 모두 기병으로 군인이 되어 전쟁에 나갔으며 평화로운 때에는 가축을 돌보고 새나 짐승을 사냥하였다. 먼거리 싸움용 무기로는 활과 화살이, 근거리 싸움용으로는 칼과 창이 있었다. 전쟁에 임해서는 상황이 유리하면 전진하고 불리하면 달아났다. 또 족장과 병사들은 같은 고기를 먹고, 무두질한 가죽을 걸치며, 가죽천막을 치고, 가죽모피를 썼다. 고기 중 어른은 기름이 있는 맛있는 곳을 먹고 노인은 그 나머지를 먹었으며 힘이 센 어른을 존경하고 늙고 약한 자를 깔보았다. 또 아버지가 죽으면 아들은 계모와 결혼하고 형제가 죽으면 그 과부와 결혼하였다. 몽골인들은 성이 없이 이름만 있으며 서로를 존대말이 없이 불렀다.

이들 유목민들에게 가축은 한 가족이었으며 다른 야생동물도 같은 초원에 살아가는 친구였다. 이중 말과 양은 생존에 필수적이었다. 말은 주요 운반수단이었으며 수렵에는 빠뜨릴 수 없는 것이었다. 몽골어에는 말의 털 색깔을 나타내는 언어가 놀라울 정도로 풍부하다. 전신의 털 색갈이나 점 모양, 갈기의 색이나 콧등의 반점 등 우리 나라 말이나 영어로는 한 문장으로 길게 써야되는 말의 구별을 몽골에서는 한마디로 표현할 수 있다. 말을 타고 나가는 수렵은 먹거리를 위한 것이었으나 군사훈련이기도 하였다. 이렇게 몽골의 특수한 자연환경이나 생활습관이 강한 전투집단을 만들었다. 말에서 짠 젖을 발효한 마유주(쿠미즈)는 상당히 강한 술이었다.

몽골에는 약 2000종의 풀이 자라고 양들은 그중 영양가 있는 700종을 가려서 먹기 때문에 그 고기를 먹는 사람은 영양결핍이 없었다. 어린양은 아무래도 널리 돌아다니지 않아 여러 종류의 풀을 충분히 먹을 수 없기 때문에 몽골인들은 양이 4살이 되기를 기다려 잡아먹었다. 사나이중의 사나이라는 사인엘은 보통 한 마리의 양을 반분하여 먹었다. 이러한 식사 후 2주간은 거의 물만 먹고 지내며 그후 남은 양의 반분을 먹고 또 2주간 식사를 하지 않고 생활하였으며 평소처럼 싸울 수 있는 반 자연인이었다. 양의 고기, 젖, 치즈 등은 식품으로, 배설물은 연료로 되었으며 양피는 의복으로 되고 양모는 유목민 특유의 거주막사로 되었다. 그외 경제에 불가결한 것으로 낙타나 화물차를 끄는 숫소 등이 있었다.

12세기 고비사막 북쪽의 초원에는 알타이족의 3대 지파인 투르크, 몽골, 퉁구스 계통의 수많은 부족들이 떠돌고 있었다. 이들은 이미 수세기에 걸쳐 이 지역에서 성행한 이족 혼의 습속으로 서로 얽히고 설켰다. 그들은 넓적한 얼굴, 납작한 코, 튀어나온 광대뼈, 째진 눈, 성긴 턱수염, 두툼한 입술, 그리고 곧고 검은머리를 하고 있었으며, 피부는 볕에 그을리고 바람과 서리에 거칠어져 가무잡잡하였다. 그들은 키가 작고 몸이 탄탄하였으며 말을 타서 다리는 활처럼 굽었다. 이들은 몽골고원의 혹독한 환경을 견디기 위하여 마디지고 왜소한 육체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지역에 따라 생활양식과 가축의 종류에서 차이가 있었다. 원시림과 호수로 둘러싸인 바이칼호나 케룰렌강, 오논강 주위에 사는 보르지긴계 몽골족과 삼림부족들은 수렵이나 반유목-반수렵의 생활을 하였으며, 초원지대와 삼림지대가 뒤섞인 셀렝게강이나 오르콘강 주변에 살고있는 메르키트족은 반유목-반수렵, 반농경 생활을 하였다. 광활한 대초원이 펼쳐진 동몽골 일대나 중부 몽골지대에 살고 있는 비보르지긴계 몽골부, 타타르부, 케레이트부는 소와 말 위주의 전형적인 유목생활을 하고 있었으며, 평원과 산지가 섞여있는 서몽골 일대의 나이만족은 양과 염소 사육을 하는 유목생활을 하였다. 고원의 남부에 살고있는 옹구트부는 낙타위주의 유목생활과 함께 특수한 지리적 조건으로 상업에도 종사하였다.

혈족과 안다(의형제) 그리고 너케르(심복)

몽골이전부터 중앙 아시아 대초원을 거쳐간 많은 유목민들은 혈족을 조직의 중심으로 삼았으나 안다(의형제)등의 관습으로 혈족을 떠나 자유선택을 할 수도 있는 열린 집단이었다. 유목사회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안다서약은 피를 섞어 마시고 몸에 걸치던 옷이나 허리띠를 서로 맞바꾸었다. 이 인위적 혈연관계는 대등한 연합관계로 단기간에 수평적인 세력을 구축할 수 있는 힘의 신디케이트였다. 즉, 오랜 동족관계에 구속되지 않는 실력있는 남자들의 결맹으로 각각 독자세력을 대표하는 관계로서 서로간의 이해가 충돌할 때는 상대를 잘 아는 호적수가 되었다.

또 하나의 자발적 행위로는 씨족을 이탈하여 자신이 선택한 지도자 밑으로 들어가는 너케르가 있었다. 심복이자 맹우라 할 이 너케르는 주인을 선택하여 자신을 맡기는 전투노비로서 무력봉사는 물론, 주인의 가족과 목축 등 인명과 재산을 보호할 의무가 있었다. 세력이 미약한 집단들은 가족 및 부족전체의 충성을 서약하고 너케르 집단을 이루기도 하였다. 이 제도로 지도자의 자질과 인간적인 품성이 있다면 누구라도 따르는 자를 불릴 수 있었다. 젊은 시절의 테무진은 고난을 헤치고 불굴의 투지로 너케르(전사)들을 끌어들였다. 안다와는 달리, 이들 너케르는 테무진을 충실히 따라 친위대의 핵을 이루며 아시아와 유럽전선에서 맹활약하였다. 마지막으로 시집을 올 때 여자는 본가에서 자신의 재산으로 할당받은 부족민과 가축을 함께 데려왔으므로 따라온 이들은 원래의 부족을 떠나 새로운 혈족관계를 만들었다.

칸(족장)

중앙아시아에 할거하던 투르크-몽골계의 지도자인 칸은 유목민의 부족, 씨족 연합체의 최고 지도자로서 노얀들 (부족, 씨족의 족장들과 군대의 부대장들)이 참가하는 대회의(쿠릴타이)에서 선출되었다. 칸은 이들이 인정한 개인적 자질에다 귀족가계가 뒷받침 되어야했다. 후계자는 칸의 가족 중에서 뽑혔는데 이때 다른 경쟁자들을 실력으로 물리쳐야만 했다. 이러한 계승방식은 생활여건이 불안정한 유목사회의 집단자구책이었다. 그러나 칸의 권력은 제한되었으며 개인보다는 일족이 지키는 것이었다. 몽골은 의외로 민주적이었다.

칸의 일차적 역할은 전쟁의 지휘였다. 전쟁이 성공하여 많은 전리품을 손에 넣으면 전사들은 이중에서 수수료로 보통 10%를 칸에게 주었다. 칸의 두 번째 역할은 대규모의 사냥을 조직하고 지휘하는 것이었다. 직경 수십 km에 달하는 몰이꾼의 대원진을 점점 좁혀 갇힌 들짐승을 칸이 맨 처음 들어가 잡았으며 이어서 노얀들 그리고 마지막에는 평민들 순으로 들짐승을 잡았다. 셋째로 칸의 명령은 전시에는 절대적이었다. 전시에 통제가 교란되면 전군이 위험에 빠지므로 칸의 즉결처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넷째로 평상시에 칸의 통치권은 자기 직할민에게 만 있었다. 각 부족, 씨족은 자치권을 가지고 모든 일을 내부에서 처리하였다. 그러나 부족, 씨족의 경계를 넘어서 분쟁이 일어나면 그 처리는 칸에게 위임되었다. 따라서 칸이란 분쟁이 일어나면 모두가 인정하는 중재자로서, 전시에는 지도자로서 유목민들의 편의에 따라 두어지는 제도였다.

여성의 지위

몽골사회에서 여성의 지위는 남성과 대등하였으며 용감하고 현명한 여자를 이상으로 여겼다. 유목민의 여성은 모두 말을 탈 수 있고 사냥도 할 수 있었으며 남자가 없을 때에는 스스로 판단하여 행동하였다. 유목생활에는 모든 사람이 일을 해야만 했으며 몽골여자들은 자식을 낳는 일 외에도 많은 일을 하였다. 여성은 양이나 소의 관리에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을 뿐 아니라 정치상의 사건과 전쟁에도 관여하였으므로 물질적 분배도 비교적 평등하였다. 여자라도 자신의 재산이 있어 결혼 후에도 자신의 재산을 유지하였다. 특히 족장들의 아내는 자신의 군대를 지휘하기까지 하였다. 자식들도 어머니가 부유하면 할수록 아버지의 상속인으로서 유리하였다.

몽골은 족외혼이라 약탈혼도 성행하였으나 정상적인 결혼 방식은 어렸을 때 결혼 상대를 정하고 샤먼에게 승인을 받는 식으로 육체적 그리고 정신적인 면이 똑같이 존중되었다. 몽골사회는 남자가 능력이 있으면 처를 많이 둘 수 있는 다처제 사회였지만 여성들은 결혼이 잘못되었다면 이혼을 할 수가 있었으며 남편이 죽으면 재혼 여부를 스스로 결정하였다. 따라서 재혼은 전혀 흠이 아니었으며 새로운 남편은 기혼녀의 아들들을 자기자식으로 받아들였다. 몽골인들은 생물학적 핏줄보다 정신적인 인연을 더욱 크게 생각하였다.

몽골의 여성들은 잘 훈련된 전사이기도 하였다. 이들은 보통 광범위한 군사훈련을 받았으며 이들 중 우수한 자들은 남자들과 같이 전투에 참가하였다. 칭기스칸도 남자들이 싸움터에 없을 때는 여성들에게 남자들의 몫을 하도록 하였다. 칭기스칸의 어머니 호엘룬도 13익의 전투에서 죽은 남편과 자신의 부하를 이끌고 싸움에 참가하였다. 후에 칭기스칸은 보상으로 그녀에게 3천호(밍간)를 주었다. 몽골인들은 남녀를 서로 보완적인 짝으로 생각하였다.

몽골인의 신앙

몽골인은 자연속에서 자연과 함께 살았다. 몽골인은 시베리아의 타이가에서 초원으로 진출하였음으로 삼림인 특유의 자연에 대한 높은 경외심을 가지고 있었다. 바이칼 호수에 연한 숲은 침엽수와 약초 그리고 잡목들이 치유, 성장, 재건을 뜻하는 대지의 품안에서 서식하였다. 숲은 보호적이고 어머니 같은 푸근함이 있어 이 숲과 함께 생활하는 사람들은 생태계에서 생명과 밀착하여 서로 보호적으로 의존하였다. 이러한 자세는 몽골사회에 샤머니즘이라는 종교적이고 사회 심리적인 현상을 가져왔다. 샤머니즘은 하늘을 중심으로 산이나 물, 불, 땅 등을 믿었다. 몽골인들은 모든 것이 하늘의 것이므로 대지의 어느것도 자신들의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러한 태도는 자연을 정복하고 통제하려는 서양과는 크게 다른, 겸손하고 범신론적인 접근으로 우주의 상호연관에 대한 인식을 나타낸다.

몽골인의 고향인 시베리아 바이칼의 칙칙하고 추운 타이가에서 여성적인 본질에 뿌리를 둔 질긴 몽골인상을 우리는 잘 모르고 있다. 몽골인이 무섭고 잔인한 전사였다는 점이 초 남성적인 이미지로 형상화됨으로서 몽골인의 정신적인 성격을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극도의 원한관계와 잔혹함은 오히려 여성적이다. 여성적인 요소는 무적의 직관력과 탄력성 때문에 가장 무자비할 수 있는 것이다. 몽골인들이 당시의 타민족보다 탁월했던 점은 사물을 처리할 때 보이는 예민한 본능과 심리적 유연성 그리고 정확하고 실질적인 융통성으로, 당시의 서양인은 말할 것도 없고, 투르크 인과 이란 인에 비하여 그들을 훨씬 우위에 서게 만들었다. 이로서 우리는 남성적인 물리력으로 이룩한 몽골인들의 위업과 함께 그들안에 들어있는 여성적이고 근본적인 시베리아 타이가의 유산, 즉 샤머니즘을 인정하여야 한다.

이것은 시베리아의 춥고 어두운 숲에 있던 매우 여성적인 사슴과 남성적이나 본질은 여성적인 이리의 몽골전설에서 잘 드러나 있다. 몽골의 샤머니즘에는 흑과 백의 2가지 상징적인 기가 있었다. 흑은 강한 공격성과 굴욕에 대한 복수를 나타냈으며 백은 반대로 따뜻한 호혜정신이나 구원을 의미하였다. 이두가지 기를 융합한 힘이 전투에서도 발휘되어 적에게는 사자같이 용맹하고 아군에게는 송아지같이 조용하였다. 몽골군은 이러한 정신적 믿음으로 전투에 임하였다. 지금까지 몇 세기동안 실종되었던 이들 몽골인의 천성을 이해하는 것은 몽골연구의 첫걸음이다.

몽골인에게 하늘은 아버지이고 땅은 어머니였으며 이 세계의 정점에는 쿠케(창천) 또는 몽케-텡그리(영원한 하늘)가 있었다. 이 하늘의 허락으로 모든 것은 천리를 따른다고 생각하였다. 몽골인은 몽케-텡그리에 가깝게 다가설 수 있는 높은 산을 숭배하여 선택된 산의 정상에서 모자를 벗고 목에 혁대를 두르고 9번 무릎을 꿇었다. 젊은 시절의 테무진도 중대한 고비마다 이 의식을 행하였다. 몽케-텡그리의 밑에는 일상생활에 중요한 신령들의 세계가 있었다. 샤먼은 인간과 이 신령들의 중개자이자 예언자로서 흰옷을 입고 백마에 올라타며 지팡이와 북을 상징물로 가지고 다녔다. 몽골사회에서 샤먼은 강력한 존재였다. 테무진도 전 몽골을 통일한 후 샤먼의 지도자 코코추와 긴박하게 대립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샤머니즘은 과거와 현재만을 지향한 믿음으로 미래에 대한 관념이 없었기 때문에 내세를 이야기하는 타종교를 잘 수용하였지만 샤머니즘의 요소는 긴 세월동안 이어져왔다. 지금도 몽골인 들은 술을 먹기 전에 좌우와 위의 하늘에 오른손 가운데 손가락으로 술을 튕겨 하늘에 바치고있다.

약탈교역

유목민에게 가축은 전 재산이었다. 그 중에서도 좋은 말은 가격차가 컸다. 그래서 평시에도 말 도둑이 많았으며 가축을 둘러싼 싸움이 전쟁으로 되기도 하였다. 유목민들간에 전쟁이 일어나면 적의 가축무리를 내몰아 가는 것이 주목적이 되었다. 세력과시와 재산축적 그리고 종족보존을 위한 수단으로 이들은 상대지역을 침범하여 가축과 부녀자를 약탈하고 포로를 잡았다. 이들의 약탈본능은 교역에서도 강하게 비쳤다.

이들은 남쪽의 농경사회에서 필요한 것을 얻어야 했다. 곡물, 차, 직물과 같은 물건과 무기를 만들기 위하여 금속이 필요하였다. 중국도 호혜원칙에서 교역을 하였지만 유목민들은 주기적으로 정착민 지역을 침략하였다. 10년에 한 번씩 초목이 마르고 가축이 죽어가 유목민들도 쓰러져 가는 몽골고원의 열악한 기후조건은 이들을 교역과 약탈로 내몰았던 것이다. 약탈은 유목민이 굶주릴 때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유목민들은 때로는 정착도시로 쳐들어가 한바탕 학살을 한 후 중국의 황제가 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