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재밋는몽골이야기

유목민의 마음의 성산 ..부르한산

몽골승마클럽 2006. 12. 30. 18:08

몽골민족의 어머니...알란고아

 

알랑 고아의 아버지 코릴라르타이-메르겐은 사냥을 잘하는 사람이다. 그는 아름다운 여인 바르고진을 아리크 오손(Arig Usun:청결한 강이라는 뜻)에서 만나 알랑 고아를 낳는다. 그런데 코릴라르타이-메르겐에게는 시기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는 코리족(Kohri)을 떠날 결심을 하고, 자신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모아 코릴라르(Khorilar)라는 씨족을 만들어 성스러운 산 부르한으로 이동한다. 성스러운 부르한 산은 땅이 좋고 사냥감이 풍부한 곳이다.
몽골 최고(最古)의 역사서인 『몽골비사』에 전해지는 성녀 알랑 고아의 이야기이다. 알랑 고아는 지금도 몽골인들에게 자신들을 낳은 어머니로 칭송받는 몽골의 시조이다. 이 부분은 알랑 고아의 탄생과 유년 시절 이야기인데, 이후 새로운 땅 부르한에서 알랑 고아는 결혼을 하고, 다섯 아들을 낳는다. 그중 세 아들은 남편이 없을 때, 몽골 설화에 의하면 ‘빛의 정령을 받아’ 낳게 된다. 그의 다섯 아들이 각각 몽골의 씨족을 이루면서 알랑 고아는 몽골인의 어머니가 된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몽골의 신화가 우리 민족의 신화와 너무 많이 닮아있다는 점이다. 코릴라르타이 메르겐이 떠나온 코리족(Kohri)은 주몽(朱蒙)이 코리 부족에서 일단의 지지 세력을 이끌고 남으로 이동하여 나라를 세운 뒤 국명을 코리의 한 나라임을 나타내기 위해 고(高:으뜸) 구려(Kohri)라고 부른 것과 거의 일치하는 내용이다. 또한 코릴라르타이 메르겐은 활을 잘 쏘는 사람이란 뜻이로, 한역하면 고주몽(高朱蒙)과 같은 이름이다.
육당 최남선(六堂 崔南善)은 우리의 불함산(不咸山, 백두산의 고대명)이 몽골의 부르한산에서 기원한 것이라고 말한다. 육당은 또 알랑 고아는 우리 민족의 노래인 ‘아리랑’의 주인공이며, 그네가 터를 잡은 ‘아리크 오손’은 ‘아리수’라는 것이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아리랑의 노래말에 나오는 “아라리가 났네”는 단순히 흥에 겨워 흥얼거리는 허사가 아니라 ‘알랑이 태어났네’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말이라는 것이다. 그 증거로 자신을 버린 님에 대한 원망과 한탄을 “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고 표현한 부분에서 유목적 원형을 찾는다. 정착민들에겐 호환, 마마 등이 큰 재앙이지만 유목민들에겐 ‘발병’이 가장 무서운 재앙일 것이다. 이동할 수 없는 유목민은 이미 사람이 아니다.

 

몽골인의 마음속 성산...부르한


부르한이란 밝음을 뜻하는 말이다. 부르한은 하늘의 빛, 즉 하늘의 뜻이 지상에 임하는 산이라는 의미를 지닌 몽골 부족의 민족 성지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부르한 산이 이동하는 성지였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부르한 산은 고정된 산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 속에 살아 있는 믿음의 산이었다는 뜻이다. 그것은 하늘의 빛이 내려 비치는 곳을 따라 이동하는 민족의 산이었다. 몽골인들이 이동하면 그 산도 이동한다. 신화학자 이윤기는 이렇게 이동하는 산, 이동하는 성지가 베링해 건너에 사는 아메리카 인디언의 문화 속에도 존재한다고 말한다(수우족의 추장 블랙 엘크 어록). 부르한산은 이동을 숙명으로 삼는 유목민들의 운명처럼 떠돌이 성지였다.
따라서 부족마다 민족마다 그 산의 위치가 달랐고, 나중에 몽골이 유라시아 대륙에 대제국을 건설했을 때 각 칸국들은 저마다 특정한 산을 부르한 산으로 정하고 하늘에 제사를 올리곤 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성지, 몽골인들이 부르한 산이라 부르는 지역은 헨티아이막 북부에 있다. 알랑 고아가 터를 잡은 곳, 칭기스칸이 어린 시절을 보낸 곳 그리고 그의 무덤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몽골 학자들은 성지의 의미를 훌륭한 조상들의 쉼터라고 말하기도 한다. 지금의 부르한 산은 칭기스칸 가문의 조상신이 머무는 곳이란 해설도 그렇게 붙여진 것이다. 이 부르한 산에서 전체 부족 회의로써 유럽 정벌이나 금나라 정벌 등 부족의 운명과 관련한 중요한 일을 결정하는 코릴타(Khurilta)를 열었고,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제천의식을 치렀다.


그렇다면 이 부르한 산이 오늘날의 몽골인들에겐 어떤 의미가 있을까? 우리도 그렇듯 그들에게도 마음속에 성지를 두고 있다는 것은 든든한 버팀목이요 축복이다. 부르한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든든하다고 말한다. 부르한 산은 조상을 대신하는 산, 할아버지 할머니 산이다. 그들은 칭기스칸을 유목민의 자존심을 지켜준 사람이라 하여 존경하고 사랑하는데, 부르한 산은 그런 칭기스칸을 낳게 하고 지켜준 산이니 얼마나 좋을 것인가.

 
하지만 정작 부르한 산이 가진 의미는 따로 있을 것이다. 고향을 바람 속에 묻어 둔다는 것이다. 유목민들은 조상의 묘를 찾아, 부모의 고향을 찾아 천리길을 떠나지 않는다. 불효나 불충이어서가 아니다. 그들에겐 과거가 지나간 시간에 불과하다. 과거는 흘러갔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초지를 찾고, 새로운 방목을 시작해야 한다. 삶도 죽음도 전쟁의 승리도 실패도 모두 그렇다. 과거를 버리지 못하면 분노와 복수심에 발목이 잡혀 한발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미래를 위해서라면 부모를 죽인 원수도 용서가 된다. 칭기스칸은 그런 마음으로 강간당한 아내도, 그렇게 태어난 아들도 받아들였다. 심지어 자신의 목을 화살로 꿰뚫은 적장도 용서하고 최측근 부하로 삼았다. 아버지를 죽인 원수의 아내가 되어 살아간 수많은 여인들의 이야기는 그런 정신에서만 이해가 가능하다. 부르한이 이동한다는 것, 마음속에 성산을 두고 산다는 것은 고향을 몸으로 찾지 않고 마음으로 찾는다는 뜻이다. 유목민의 고향은 바람 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