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재밋는몽골이야기

제1장 유라시아 초원의 세계(스텝 대초원)

몽골승마클럽 2007. 1. 13. 14:38

제1장 유라시아 초원의 세계
스텝 대초원

지리/ 유목의 초기역사/ 흉노(훈)제국/ 돌궐제국/ 위구르제국/ 키타이(요)제국/ 금(여진)제국/ 탕구트(서하)제국/ 카라키타이(서요)제국/ 코라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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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

아시아 고원지대는 서로 다른 시기에 생긴 천산-알타이 습곡과 히말라야 고산습곡이 충돌하면서 생겨난 것으로, 서북부에는 활처럼 휜 천산과 알타이산맥이 있고 남쪽에는 반대방향으로 휜 히말라야산맥이 있어 투르키스탄과 몽골리아를 둘러싸고 있다. 이 두 지역은 고원의 오지로서 여름에는 찌는 듯한 더위와 겨울에는 살을 에는 추위를 보이는 아주 극단적인 대륙성기후를 갖고있다. 그러나 이들 지역을 제외한 나머지 유라시아 내륙은 가로로 길게 띠를 이룬 8,000 km의 초원으로 덮여 있다. 헝가리에서 시작하여 동쪽으로 우크라이나와 남부 러시아를 지나 중앙 아시아와 만주까지 뻗어 있는 이 띠 모양의 넓은 초원에는 트란속시아나의 키질쿰과 아무다리아 강 남쪽의 카라쿰 사막, 타림분지로 둘러싸인 타클라마칸 사막, 그리고 타클라마칸 사막과의 접점인 롭노르에서 만주의 경계를 이루는 대흥안령 산맥까지 서남쪽에서 동북쪽을 향해 펼쳐져 있는 고비사막이 있다.

이들 사막에는 복잡한 산맥들이 있고 고도가 높을수록 강우량은 증가하여 산봉우리에는 만년설로 덮여 여기에서 내려오는 시냇물은 저지대의 마른땅으로 흘러 관개농업이 가능하였다. 즉, 산들의 주위는 푸른 숲의 섬이 되는 오아시스가 있었으며 이곳 오아시스 주민들은 유목민을 보완하는 기술과 물건으로 초원의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중국 등의 정착지역은 연해 바다의 습기로 생긴 커다란 오아시스라고도 할 수 있다.

이 유라시아 초원지대는 알타이 산맥에서 대흥안령 산맥까지 약 2,400 km, 남북으로 600-800 km에 걸쳐 펼쳐진 동부초원과, 다뉴브강 입구에서 시작하여 흑해 북안을 따라 볼가강 하류를 지나 알타이 산맥까지 약 4,000km, 그 폭은 320-950km 정도인 서부초원으로 나뉘어진다. 서부초원은 우랄산맥의 남쪽에 있는 우랄 강의 양안에 끝없이 펼쳐져 있으며 가끔 강과 시내 물이 초원을 남북으로 가른다. 이 강줄기들은 북쪽이나 남쪽으로 천천히 흘러, 여름에는 조그만 배로 그리고 겨울에는 썰매로 강을 따라 짐을 쉽게 운반할 수 있었으므로 교역이 쉬웠다. 계절적으로 대서양에서 비를 함유한 바람이 서유럽에 비를 뿌리다 돈강에서부터 산발적으로 되면서 강수량이 감소하므로 우크라이나와 루마니아 주위에는 자연 목초지가 잘 형성되었으나 동쪽으로 갈수록 목초지의 조건이 나빠 유목민들은 서쪽으로 이동하려 하였다.

동부초원은 몽골고원과 그 주변지역을 포함하고 있으며 기후는 고도가 높아서 매우 춥고, 년간 강우량이 250-500 mm로 적어 풀이 계절적으로 듬성듬성 자란다. 따라서 동부초원은 서부초원보다 사람이 살기에 더욱 혹독한 땅이다. 이러한 조건에서 살아가는 동부초원의 유목민들은 역사적으로 만주와 북 중국으로 남진과 동진, 그리고 서부초원의 좋은 초지를 찾아 일리강의 계곡과 발하쉬 호반을 따라, 천산-알타이산맥 사이의 통로를 지나 서진 하였다. 이러한 이주와 정복은 중국과 중동 그리고 인도와 유럽의 정착민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으며 유목민들은 유라시아 초원의 독특한 지형과 식생으로 초원문화라는 공통의 역사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유목민들은 기록을 남기지 않아 AD 1000년까지 초원제국의 흥망에 관한 정보는 매우 불확실하다.

유라시아초원의 동, 서 양끝은 만주와 헝가리로 연결된다. 이들 지역은 유목과 농업의 혼합경제가 형성되었다. 유라시아 초원의 서남쪽 변두리인 중동지역은 초지로 연결되어 있다. 이들 서남방 초지에는 또 다른 유목형태가 일어나 홍해를 건너 아프리카 깊숙이 까지 뻗어있었다. 유목 기마민에게 카프카즈를 넘는 것은 쉬웠으므로 북쪽의 유라시아 초원에서 서남방 초지로의 이동이 반복되어, 두개의 다른 유목전통 즉, 북쪽의 인도-유럽계와 투르크-몽골계가 서남방의 셈족과 섞이게 되었다.

유라시아초원의 북쪽은 삼림지대로 연결되며 긴 겨울과 짧고 서늘한 여름으로 침엽수가 자라고 있다. 이러한 타이가 지역은 사람이 사는 북방한계선으로 초원지대보다 더욱 살기 힘들다. 특히, 몽골고원의 북으로는 발을 들여놓을 수 없는 시베리아의 대 산림인 타이가와 바이칼 호수가 있으며 그 넘어 북쪽 끝은 춥고 건조한 불모산지로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이곳 아시아의 타이가에 사는 수렵민과 채집민들은 일찍부터 초원지대로 이주하기 시작하였으며 추위와 더위 그리고 계절의 혹독함에 단련된 이들은 몽골고원을 차지하기 위한 경쟁에서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몽골고원의 남으로는 메마른 고비사막, 그리고 이 모래사막 넘어에는 내 몽골 초원과 북 중국이라는 정착문명이 있었다. 이 고원의 동쪽 끝에는 대흥안령 초지가 펼쳐져 있으며 서쪽 끝에는 천산-알타이산맥이 가로놓여 있다. 중앙은 오르콘 강 유역의 계곡을 따라 오아시스도 있으나 대부분은 나무가 자랄 수 없고 농경에도 적합하지 않은, 그러나 양이나 소의 방목에는 이상적인 초원이 펼쳐져 있다. 즉, 이 몽골고원의 절반은 광활한 대 초원지대이지만, 그 나머지는 원시림과 호수 그리고 반 사막지대로 이루어져 있다.

유목의 초기역사

유라시아 초원의 역사는 지금으로부터 25,000년에서 35,000년 이전의 후기 홍적세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때에는 유럽이 시베리아보다 더 추워 얼음이 북부 프랑스를 덮고 있었으나 북위 60도선 이남의 시베리아는 얼지 않았다. 이때 유라시아 초원을 차지한 초기 인류는 삼림지역에 사는 이웃들과 비슷하였다. 유라시아 어느 곳이든 구석기 도구와 병기를 이용하는 수렵, 채집인이, 곡류를 재배하고 동물을 가축화하며 도기를 색칠하는 신석기 농경민으로 대체되기 시작하였다. 초원에 사는 수렵, 채집인의 결정적인 발전은 말을 가축화한 것으로, BC 4,000년경 유목민들은 스텝남부에서 가축화한 소, 양, 염소를 키우는 것과 동시에 말떼를 집단 사육할 수 있었다. 이때부터 집단화된 가축은 풀이 자라는 속도보다 더 빨리 풀을 먹어 치웠으므로 가축을 불리기 위해서는 유목생활이 필요하게 되어, 작물을 키우고 가축을 기르는 사람과 오로지 양떼와 소떼의 제품에만 의존하여 연중 이 목장에서 저 목장으로 이동하는 사람간에는 분명한 구분이 생기게 되었다. 즉, 초원에 사는 사람들은 점차 그들의 채집생활양식을 버리고 정착농업생활을 했지만 말을 기르면서부터 그들의 생활방식은 다시 목초지를 찾아도는 이동생활로 바뀌었다.

아마 유목은 인류가 어미 젖꼭지에서 새끼 숫양과 숫 송아지 그리고 망아지를 떼어놓는 새로운 생태적 방식을 발견하여 주로 동물의 젖과 유제품을 새로운 식량 원으로 하여 살아가는 것을 배운 후에야 확실히 독자적으로 발전되었을 것이다. 젖을 분비하는 동물들을 길들여 사람의 손으로 젖을 짤 수 있게 하도록 만들어야 했으며, 어린이가 모유를 소화시키는데 필요한 효소를 어른이 될 때까지 계속 분비하도록 유목민은 생리적으로 적응되어야 했다. 이러한 적응을 하는데는 분명 상당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유라시아 서부초원에는 인도 유럽인들이 각 집단마다 1가지 가축만을 다루는 소집단에 기반을 둔 유목생활을 하였다. 이들은 부족 연맹체를 만들고 추장에게 군사를 소집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 이들은 말을 이용한 전차로 BC 1700년 이후 중동지방을 휩쓸었다. 전차는 전쟁용으로서 일상생활에는 널리 쓰이지 않았지만 이후부터 초원에는 기동성이 큰 기마술이 발전되어 유목 기마병은 페르시아 제국과 중국을 항상 위협하였다. 유목민들은 정착민의 방어에 허점이 발견되면 재빨리 뚫고 들어갈 수 있는 기마군을 모으기가 쉬웠으므로 이때부터 유라시아의 역사는 유목민의 약탈과 정복을 막기 위한 농경사회의 대항으로 점철되었다.

BC 700년부터 유목민 스키타이 인들이 중동지방으로 쳐들어오기 시작하여 BC 612년에는 앗시리아 제국을 멸망시켰다. 또 BC 3세기에는 파르티아인이 셀레우코스 제국으로 침입하였다. 파르티아인들은 일단 토지를 차지하자 여기에 사료작물로 알팔파를 재배하였으며 이 식물을 먹고 자란 말은 잡초를 먹고 자란 말보다 발육상태가 좋아 중무장한 전사를 태울 수 있어 계속되는 다른 유목민들의 침입을 막을 수가 있었다. 이때부터 안정기가 계속되었으며 아시아를 가로지르는 스텝루트를 따라 로마에서 중국까지 각종 상품과 사상들이 교환되었다. 이 스텝루트에서 유목민, 특히 서투루키스탄 인이 대상활동을 하였으며 중국산 비단이 일종의 화폐역할을 하였다.

흉노(훈)제국

옛부터 몽골고원이 있는 유라시아 동부의 광활한 초원은 투르크, 몽골, 퉁구스계통 유목민의 격렬한 각축장으로 이들 기마 집단은 아시아와 유럽으로 퍼져나가면서 흉노, 선비, 탁발, 유연, 돌궐, 위구르, 키르기즈, 키타이(거란) 등 강력한 제국을 건설하였다. 초원의 지배자는 바뀌어도 패배한 민족의 일부는 옛부터 살던 곳에 그대로 남아 스스로 정복민의 이름하에 정복집단의 하층을 구성함으로서 그들간의 구분은 점점 엷어졌다.

동부초원의 외몽골과 중국북부 사이에 있는 고비사막을 건너 유목민이 중국을 성공적으로 약탈하는 데에는 서부초원보다 더 큰 규모의 조직과 중앙집권적 지휘체계가 필요하였다. 이윽고 BC 3세기경 중국이 한나라로 통일될 때, 흉노(훈)는 유목민을 통일하여 몽골고원과 만주일대에 최초의 대 부족제국을 건설하였다. 초대의 흉노군주(선우)는 모돈선우로 중앙아시아의 유목민과 오아시스 정주민을 정복하였으며, 병사는 많아도 대부분 농민출신 보병인 한고조 유방을 산서에서 포위하여 많은 재물을 받고 풀어주었다. 이렇게 거의 700년 동안 중국의 한나라를 짓누르던 흉노는 내부 분열과 몽골계 선비족과 후한의 연합공세로 쇠퇴하여 일부는 서쪽으로 이동하여 중앙아시아로 들어간 후 계속 서진하여 5세기경 매우 변형된 모습으로 유럽에 등장하였다. 이들을 로마제국에서는 훈이라 불렀다. 훈은 중앙아시아에서 이동해와 북 코카서스, 우크라이나 그리고 헝가리로 들어가 동은 볼가강에서 서는 도나우강까지 퍼져 동로마제국을 괴롭히고 게르만의 여러 부족을 정복하였다. 이들에 밀린 게르만의 여러 부족이 일제히 서로마 영내로 침입하여 서 로마제국은 476년에 멸망하였다.

흉노의 다른 일부는 남쪽으로 이동하여 중국의 한족에 흡수 편입되었다. 4세기초 이들은 중국의 진나라에 반란을 일으켜 5호16국이라는 민족의 대이동을 가져왔다. 135년간 계속된 이 난으로 화북땅은 한족의 인구가 격감되어 흉노나 기타 북아시아 출신의 유목민, 수렵민에게 점령되어버렸으며 결국 선비가 세운 북위가 5세기 반경에 화북을 통일하여 남북조시대가 되었다. 이렇게 흉노(훈)의 활약으로 서양에서는 고대의 끝이고 중세의 시작인 민족의 대이동이 일어났으며 동양에서는 5호 16국의 난이 일어나 세계사에 끼친 흉노(훈)의 영향은 대단히 컸다.

돌궐제국

흉노를 대신한 선비가 남하하여 내몽골과 화북으로 이동하자 4세기말에 유연이란 유목민이 외몽골에서 일어났다. 이 유연제국은 1세기 반동안 번영한 후 552년 알타이 산맥의 외튀겐 산록 부근에서 이곳에 내습한 투르크(돌궐)부족에게 격파되자 서진하여 헝가리의 아바르 족이 되었다. 투르크(돌궐)제국의 세력권은 만주의 요하에서 부터 페르시아 제국의 접경까지로서 이들은 문자기록을 남기고 고유전통을 유지하였다.

이들은 중국 대륙이 남북조에서 수로 이어지는 혼란기에 거대세력으로 성장하여, 중국을 통일한 화북 선비계의 수나라와 당나라는 돌궐의 카간에게 신종맹세를 하였다. 이후 돌궐제국과 당나라는 비단길의 장악 등 경제, 문화적 갈등으로 빈번하게 충돌하였다. 침략과 약탈로써 경제적 풍요를 구가하던 돌궐제국은 위구르의 독립, 이슬람 세력의 중앙아시아 진출, 그리고 당과 티베트의 협공으로 8세기 중엽 멸망하였다. 이후 이들 투르크족은 서아시아와 중동지방으로 이동하여 군사력으로 이슬람세계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셀쥭조, 가스니조, 호라즘샤조, 맘룩조, 그리고 오스만조등을 세웠다. 북인도의 힌두스탄 평원도 투르크계 이슬람정권이 지배하게 되었으며 골조, 델리술탄 정권을 거쳐 무갈조에서는 중앙아시아와 같은 정치구도가 되었다.

위구르제국

돌궐제국이 붕괴하자 몽골고원은 위구르족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위구르족은 카라코룸 근처 오르콘강의 계곡에 수도를 정하고 공용어로서 투르크어를 차용하였다. 사마르칸드와 부하라 일대에서 4세기부터 비단길의 중개무역에 종사한 페르시아계 소구트인 역시 위구르에 편입되었다. 위구르제국은 약체화된 당 왕실을 도와 유라시아 동방의 패권을 장악하여 8세기 중엽이후 거의 1세기동안 중앙아시아의 동서 교역로를 장악하였다. 위구르제국이 840년 알타이 북부의 키르기스족에게 패망하자 이들은 몽골고원을 버리고 타림분지의 오아시스로 이동하였다. 스텝의 유목전통을 유지하면서도 정주국가를 조직할 수 있는 그들의 관리능력은 후에 칭기스칸의 눈에 띠게되어 위구르인의 법 관습 등이 몽골제국의 형성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키타이(요)제국

위구르의 해체 후 당나라의 권위가 완전히 실추되면서 티베트계의 탕구트(서하)족과 몽골계의 키타이(요)족이 떠올랐다. 907년 염적이었던 주전충이 당나라를 없애고 황하중류의 개봉을 수도로 하여 후량을 세우자, 키타이족의 야율아보기도 내부 적대세력들의 압력을 피하여 철광석 채광과 영농이 가능한 내몽골의 열하지방을 본거지로 키타이(요)제국을 세움으로서 남북대립의 형태가 되었다. 그러나 키타이 제국은 본거지 열하초원 외에 몽골고원의 동쪽을 간접통치하고, 발해를 흡수하여 만주지방 전역과 중화본토의 북쪽 연운 16주까지 차지하는등 송을 압도하였다.

키타이는 잡다한 이민족을 통치하였으므로 상당히 복합적인 행정구조를 발전시켰다. 키타이는 유목적 요소를 버리지 않았던 최초의 중원왕조로 유목민족들의 특성을 잘 파악할 수 있었던 만큼, 독특한 대 북방정책을 운용하고 있었다. 키타이는 북면관의 서북로 초토사가 몽골고원 유목민족들을 관장해 왔으며, 또 군목유라 불리는 잡호군으로 이들을 통제하고 있었다. 그러나 12세기초 키타이는 내부분열로 여진족의 신흥국가 금나라에 허를 찔리게 되었다.

1125년 키타이는 해체되어 절반은 금나라에 항복하여 그들의 유력한 군사력으로 되거나 관료로 되었으며, 나머지 일부는 야율대석의 인솔하에 몽골고원의 여러 세력을 규합하여 우즈벡스탄 등 중앙아시아로 들어가 1132년 파미르의 동서에 걸쳐 제2차 키타이제국인 카라키타이(서요)를 수립하였다.

금(여진)제국

키타이(요)가 멸망하자 중국의 중북부 지역에 있던 많은 키타이인(거란)들은 여진족 금나라에 흡수되었다. 중국은 한족국가인 송과 여진의 금나라 그리고 중국 서북지방의 티베트계 탕구트(서하)왕국으로 3분되었다. 키타이에 이어 송나라를 밀어내고 중원을 차지한 금나라는 키타이 서북로의 확대판인 동북로, 서북로, 서남로라는 특별 변방군구를 설치한 뒤, 그곳의 잡호군과 키타이족을 한데 묶어 새로운 조직을 만들어 몽골고원 세력을 방비하였다. 그러나 금나라는 한화정책을 가속화하고 남송을 경략하려고 금나라의 기초인 맹안모극호와 키타이인들을 화북지방으로 이주시켜 변방방어가 약화되었다.

이 문제를 풀려고 금나라 세종은 1163년부터 몽골부나 타타르부에서 수많은 장정들을 사로잡아 군에 편입시키거나 노예로 팔았다. 또한 금나라는 변보와 계호를 구축하여 둔전방식으로 변방을 수비하려고도 하였다. 변보는 요해처에 보를 쌓아 그곳에 군을 배치한 뒤 적을 방어하는 요새이며, 계호는 말이 건너오지 못하도록 장성식으로 파놓은 깊은 구덩이이다. 그럼에도 키타이(요)는 초원의 부족에서 일탈하지 않았으나 금나라는 중국화되어 몽골고원에는 권력의 진공상태가 생기자 금나라는 분할과 간접통치로 이를 메꾸려 하였다.

탕구트(서하)제국

탕구트는 1032년에 원호가 나라를 세우고 중국식으로 통치되었으나 그 지리적 위치 때문에, 상업위주의 사람과 유목위주의 사람으로 나뉘어져 있었으며, 거주방식도 성곽과 유목이 섞여 있었다. 탕구트는 동서교역로 상에 있었으므로 정부세입은 주로 통상으로 조달되었다. 탕구트는 상업이나 불교전파 등에서 몽골의 케레이트와 접촉이 있었다.

카라키타이(서요)제국

12세기 초 키타이가 금나라에 무너지고 내몽골이 금나라 땅으로 되자 야율대석은 외몽골의 여러 부족과 위구르의 지원으로 서방으로 이동하여 시르다리아강 주변의 코스오르도에 카라키타이를 세웠다. 카라키타이는 1142년 사마르칸드 부근의 카트완 초원에서 10만에 달하는 셀죽의 산자르군을 격파한 뒤, 카쉬가르, 야르칸트, 위구르, 카를룩, 코라즘 등 동투르키스탄 일대의 여러 나라를 지배하는 대제국으로 발전하여 금나라에 있는 키타이인들의 정신적 고국이 되었다. 이후 카라키타이는 점점 중국적인 성격을 잃고 대다수의 초원세력이 그러했던 것처럼 십진법으로 조직된 전통적인 초원의 기마군으로 변하였다.

카라키타이는 몽골고원의 여러 부족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특히 케레이트부의 토오릴은 서몽골의 강자인 나이만부를 견제하기 위하여 카라키타이와 꾸준히 접촉하고 있었다. 그러나 카라키타이는 13세기초 망명한 나이만의 왕자 쿠출룩에게 동부영토의 절반을 잃고, 제국의 서부지역이 코라즘 왕국에 병합되어 번국이 되었다. 그후 카라키타이는 위구르와 같이 몽골에 쉽게 복속하여 그들에게 유목민이 세울수 있는 제국의 기본모형을 전하였다. 몽골은 중국에서 경험이 풍부한 키타이족의 관리를 얻은 위에 카라키타이를 정복함으로서 어떤 의미에서 키타이족의 계승국가가 되었다.

코라즘

카라키타이의 서방에는 이슬람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트란속시아나와 이란의 거의 전지역은 코라즘의 술탄들이 지배하였는데, 그들은 이슬람신앙과 아랍-페르시아문화를 가진 투르크족 들이었다. 아랄해 부근의 비옥한 지역의 지배왕조인 코라즘은 11세기에 셀죽술탄이 임명한 지방관의 후예였다. 코라즘은 원래 카라키타이에 예속되었으나 술탄 무하마드는 이를 거부하고 주위를 정복하기 시작하여 15년 후에는 이란의 태반을 장악하고 1210년에는 카라키타이에게서 트란속시아나를 빼앗은 후 이곳의 최대도시 사마르칸드로 수도를 옮겼다. 또 무하마드는 아프가니스탄 지역을 골조의 술탄으로부터 빼앗았다.

셀죽의 지배가 무너지자 코라즘의 서쪽에서는 바그다드의 칼리프인 알나지르가 몇 세기만에 처음으로 정치권력을 회복하였다. 이보다 더 서쪽에는 살라딘의 후계자들이 시리아와 이집트를 통치하고 있었다. 그들의 뒤로 아시아의 나머지 무슬림지역은 쿠르드족 아랍문화를 가진 시리아와 이집트의 아유브조 술탄들에 의하여 나뉘어 있었다.